내 친구 중엔 두 명의 쾌녀가 있다. 한 명은 첫째 쾌녀고, 다른 한 명은 막내 쾌녀다. 그래서 각각 첫쾌, 막쾌라 부른다. 나는 둘쾌다. 어느새 이들을 만난 지 8년이다. 대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 처음 만나 오랫동안 지지고 볶은 사이다. 우리 사이가 계속 긴밀하기만 했다고 말할 순 없지만, 뜨거운 밀착과 소원한 거리감을 오간 뒤 두터운 관계를 쌓는 데 성공했다.
오래 전 막쾌가 했던 말 중 강렬하게 다가온 말이 있다. 수년이 지난 지금도 자주 떠오른다. 자기 마음 속에는 어떤 선이 있는데, 그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무슨 짓을 해도 용서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우리의 관계가 어떤 필연적인 또는 우연적인 아픔을 주어도, 관계의 중단만큼은 선택지에서 배제하겠다는 뜻이다. 그렇게까지 우리의 관계를 영구적으로 여기고 있었다니. 가슴이 저미는 고백이었다. 가족을 제외하고, 어떤 사람한테서 이렇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 이리 깊은 애정을 건넬 수 있다는 것도 생경한데, 내가 그 애정을 받을 자격이 되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학창시절을 지나오며 많은 친구들과의 헤어짐을 겪었다. 초등학교 때 ‘절교’를 밥 먹듯이 외치던 친구와 결국 절교하게 되었고, 중학교 때는 이런저런 무리에 섞이고 방출되며 소수의 친구들만 곁에 남았다. 고등학교 때는 유치한 파벌 싸움은 없었지만, 3년 내내 꼭 붙어다니던 친구에게 크게 실망하고 등을 돌렸다. 대학교에 들어와 고향을 떠나오고 각자 바쁜 생활을 이어가게 되니, 인간관계의 가깝고 멀어지는 흐름은 붙잡을 수 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친구란 그렇게 적당한 사이인 줄로만 알았다. 깊게 애정했더라도, 헤어짐을 감내해야 하는 인생의 자연스러운 흥망성쇠 같은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막쾌의 절절한 고백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랑을 알아차리지 못했나보다. 나는 그로부터 도망친 적이 있었다. 몇 번의 민폐 끝에, 이 친구가 겪었을 불편과 원망을 마주하지 못해 일부러 멀어졌다. 어차피 쟤도 날 더 이상 보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라 변명하며. 마침 해외로 떠날 일도 있어서, 그렇게 몸도 마음도 멀리 두었다.
나의 자발적 유배 기간 동안 첫쾌와 막쾌가 많이 가까워졌다고 들었다. 이후 오랫동안 비슷한 꿈을 여러 번 꾸었다. 첫쾌와 막쾌가 나를 험담하고 비난하고 외면하는 꿈이었다. 첫쾌와는 2년 남짓의 시간 동안 동거했음에도, 나를 싫어할 만한 부분이 여럿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동거인으로서 참 별로일 수 있다는 생각에 그도 나와의 동거를 추억으로 여길지 의심스러웠다. 그가 힘겨워할 때 힘이 되어주지 못해서, 나 살기 바쁜 인간이라서, 나는 그에게 중요한 사람이 아닐 것 같았다. 첫쾌와는 멀어진 적은 없었지만, 속으로 혼자 삽질하고 있었던 기간이 꽤 길었다. 그래서 첫쾌와 막쾌가 손 잡고 날 미워할 거라 생각했나 보다. 그런 꿈을 꾸었던 걸 보면.
어떤 슬픈 계기로 막쾌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날 막쾌와 짤막한 대화를 나누고 사건의 진상을 알아차렸다. 막쾌는 내 민폐보다 도망침이 더 미웠다고 그랬다. 끈을 놓아버린 것은 나였다. 미움과 원망을 끌어안으며 계속 함께할 생각은 못하고, 모든 걸 포기했던 것이다. 싸우며 큰다는 걸 미처 몰랐다. 그래서 마음 속에 묻어두고 외면하는 동안 난 계속 옛날에 머물렀다. 못 싸워서 못 큰 셈이다. 사과를 했다. 꽤나 여러 번 했다. 막쾌가 이제 그만 사과하라고 할 때까지. 우리의 관계는 금방 회복되지 않았다. 복구는 조금씩, 천천히 이루어졌다. 그래서 어느새 지금 우리는, 예전보다 더 애틋하다. 막쾌와 화해한 순간부터 나는 다시 자라나고 있다.
막쾌한테서 첫쾌의 비밀스러운 마음도 전해들었다. 나와 살 때 아쉬운 게 하나도 없었다고, 좋은 순간밖에 없었다고, 그 말을 듣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첫쾌는 날 정말 좋아했다. 내가 이렇게 깊은 사랑 받을 수도 있나 싶어서 눈물을 뿜어내며 울었다. 미친듯이 고마웠다. 막쾌는 한결같은 사랑을 주는 법을 첫쾌한테서 배웠다고 했다. 난 2년 붙어있으면서도 못 배운 점이었다. 이들의 애정을 한 줌도 알아채지 못했던 내가 바보 멍청이였다. 그 사랑을 받고도 친구를 올곧게 바라볼 줄도, 자신 있게 다가갈 줄도 몰랐던 심각한 겁쟁이였다.
지금 나는 첫쾌와 막쾌에게서 무지막지한 사랑을 받고 있다. 심지어 한 동네에 살아서 자주자주 만난다. 우정의 극한을 알려준 이들의 품으로 다시 돌아와서 행복하다. 이 쾌녀들 덕분에 내가 얼마나 잔잔한 안정감을 느끼는지 이들은 알까. 내가 일상을 씩씩하게 성큼성큼 보낼 수 있는 것은 다 얘네들 덕분이다. 언제나 순도 100%의 애정을 느낀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무슨 짓을 해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막쾌의 말을 나도 꺼내볼 수 있을 것 같다. 내 삶에 이런 인연이 자리하고 있다는 게 믿을 수 없이 감사하다. 앞으로도 우리 사이의 간격은 더 좁혀지거나 더 늘어날 수도 있겠지. 그러나 나는 이 쾌녀들로부터 유연하고 탄력 있게 관계를 지속하는 법을 배웠다. 그래서 우리 사이는 늘어날지언정 끊어지지 않을 것이고, 늘어나도 곧바로 당겨 끌어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