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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성의 재해석과 전략적 활용 (1)

'남성적'이고도 '여성적'이었던 깁슨 걸

by 희량

이번 글에서는 1890년대부터 1910년대까지 여성 운동가들의 모습을 살펴보자. 19세기 중반, 블루머를 비롯한 복식개혁운동의 열풍이 이어졌고, 19세기 후반이 되자 여성은 새로운 여성상을 맞이했다. 바로 깁슨 걸(Gibson girl)이다.


19세기를 복습해보자면, 이 시기는 여성의 교육이 시작되고 여러 조직이 만들어지면서 사회 운동을 전개하던 때다. 이때 젠더 규범과 여성성에 도전하는 여성들을 신여성(New Woman)이라고 불렀다. 대체로 블루머를 착용하거나 18세기 여성 참정권 운동에 참여했던 여성이 신여성에 해당됐는데, 깁슨 걸도 신여성이라고 묘사되기도 하고 신여성과는 구분되기도 한다. 깁슨 걸의 복합적인 성격을 잘 들여다보자.



연약한 여성과 활동적인 깁슨 걸


‘깁슨 걸’은 미국의 삽화가 찰스 다나 깁슨(Charles dana gibson)이 그린 만화의 주인공이었다. 잡지 라이브(Life)에서 연재하던 만화였는데, 1894년 출판되었을 때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일으켰다. 깁슨 걸은 흰 블라우스와 검고 긴 치마를 착용하고 허리를 가늘게 조인 모습이다.


default.jpg Gibson GIrl, 이미지 출처: National Gallery of Art


깁슨 걸의 모습은 가는 허리와 곡선의 몸을 강조하는 전통적인 여성성과 일치한다. 하지만 이들의 모습이 ‘여성적'이라고 해서 여성의 권리를 위한 사회 운동과 관련이 없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 깁슨 걸이 가진 개혁적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대 유행했던 여성상을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전환되던 시기에는 지난 글에서도 언급했던 ‘Steel-engraving lady’라는 창백하고 연약한 여성상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레이디는 “True Woman(진정한 여성)”이라고 불릴 정도로 당대의 규범적인 여성성을 대표하는 이미지였다. 자세한 묘사를 읽어보자.


Steel-Engraving Lady의 이미지는 빅토리아 시대 여성성 이데올로기의 시각적 구현으로, 흔히 ‘진정한 여성성(Cult of True Womanhood)’이라 불린다. ‘진정한 여성성’의 이상에 따르면, 모든 여성은 남성보다 더 순결하고 고귀하지만, 동시에 더 연약한 존재로 간주되었다. 불쾌한 대화 주제, 큰 소리, 무례한 발언, 혹은 보기 싫은 광경 하나만으로도 ‘진정한 여성성’을 지닌 이들의 감수성은 무너질 수 있었고, 그 결과 실신하거나 더 심한 상태에 이를 수도 있었다. 이상적인 여성은 이러한 기질을 드러내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유지해야 했다. 그녀의 몸짓은 적고, 우아하며, 몸에 가깝게 유지되었으며, 목소리는 부드럽고 낮으며, 천천히 말해야 했다. 그녀의 표정은 평온했지만 빛을 띠었으며, 그녀의 단정한 차림새와 복장 또한 이러한 ‘여성적’ 기질을 반영했다(Scott, 2005: 30).


반대로 깁슨 걸은 어땠을까. 다음 설명을 읽어보자.

만약 당신이 스틸 인그레이빙 레이디(Steel-Engraving Lady)의 팬이었다면—세기 전환기(1900년대 초)의 많은 관객들이 여전히 그랬다—깁슨 걸(Gibson Girl)은 예의도, 우아함도, 교양도, 그 어떤 구제할 만한 특징도 없는 듯 보였을 것이다. 깁슨의 여주인공은 튼튼한 신발을 신고 쿵쿵거리며 걸어 다녔고, 허리에 손을 얹고 서 있었으며, 앉을 때는 다리를 꼬았다. 그녀는 주변 남성들에게 경외심을 느끼지 않았다. 그들이 숙녀에게 마땅히 보여야 할 예우를 갖추지 않아도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녀는 무례할 정도로 뻔뻔할 때도 있었고, 자신의 학업 성취에 대해 짜증날 정도로 우쭐해했으며, 가정이나 자녀에 대한 고려 없이 이기적으로 자신의 커리어를 계획했다(Scott, 2005: 91).


깁슨 걸은 태도에서 기존의 여성과 달랐다. 소극적이지 않았고, 진취적이었다. 게다가 깁슨 걸은 셔츠웨이스트라는 단추가 달린 흰 블라우스를 착용했는데, 이는 남성복 셔츠를 모델로 하여 개발되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당시 여성에게 셔츠웨이스트는 ‘매니쉬’한 스타일을 나타냈을 것이다. 이를 어두운 색 치마, 넥타이까지도 함께 착용하면서 기존의 여성복과는 다른 외양을 의도했다. 즉 우리가 보는 시각과 달리, 깁슨 걸의 모습은 당시에 꽤나 급진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깁슨 걸 스타일은 이성주의 복식처럼 기존의 여성복에 반하는 형태는 아니었지만, 여성의 변화된 지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여성의 권리에 대한 목소리를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캐주얼하게 입고 스포츠를 즐기는 모습은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여성상을 나타내면서 신여성의 전형으로 여겨졌다(박현숙, 2016). 백인 여성 대학생은 깁슨 걸 스타일을 수용하면서 스스로의 정치적 견해를 표현하면서 교육 받은 여성은 남성화된다는 고정관념에 도전했다(Robinovitch-Fox, 2021). 이는 여성이 직업, 교육, 소비 문화에 참여하는 등 사회활동을 시작하게 된 당대의 사회문화적 변화를 보여주며, 독립적인 ‘신여성(New woman)’을 나타내는 여성 권리 운동의 상징과도 같았다(Robinovitch-Fox, 2021).



깁슨 걸의 한계


깁슨 걸이 ‘깁슨'이라는 남성이 그린 그림으로부터 유래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그림은 사진이 아니라는 점에서 의도적인 가공을 거치게 되는데, 이 가공은 사회적인 통념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깁슨은 여성의 사회 활동에 대한 불편한 시각을 드러내면서 깁슨 걸을 폄하된 신여성으로 묘사했다(박현숙, 2016).


더불어 깁슨 걸은 여전히 예뻤고 매력 있는 여성으로 묘사되었다. 깁슨 걸은 예쁘고 날씬한 백인 여성으로 이상화되었고, 다시 여성들은 ‘깁슨 걸처럼’ 되어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다. 빅토리아 시기 여성을 괴롭혔던 코르셋의 역할은 깁슨 걸로 다시 이어진다.


게다가 깁슨 걸의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성격은 새로운 연애관, 결혼관과도 관련되어 보이는데, 이는 신여성처럼 여겨지는 깁슨 걸조차 이성애 관계 속 남성의 대상으로 머무를 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깁슨 걸은] 친근하고 다소 충동적인 면이 있었다. 때때로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게 표현했으며, 경솔하게 자신이 ‘속하지 않은’ 장소나 상황에 뛰어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의 판단력 부족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모두에게, 특히 그녀를 알고 지내던 젊은 남성들에게 사랑받았다. 이 여주인공은 ‘총명함과 유머로 가득한 얼굴’을 가졌으며, ‘미소 속에 도전적인 무언가’를 품고 있었다. (…) 이야기 속 남성들은 그녀가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여성이라기보다 활동적이고, ‘쾌활하며(jolly), ‘똑똑한(clever)’ 여성이라는 점에 매료되었다. 종종 이러한 이야기들은 구애와 결혼에 대한 현대적인 관점을 반영하며, 남녀 관계를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동반자적인(companionable)’ 관계로 묘사했다(Scott, 2005: 95).

현대로 접어들면서 이성애 기반의 연애와 결혼이 전통적인 모습과는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정의되었는데, 그 관계에 깁슨 걸 스타일이 적절히 어울렸던 것이다. 이렇게 깁슨 걸은 다시 여성과 남성의 전통적 젠더 규범에 귀속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깁슨 걸은 젠더 규범에 도전적인 신여성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다.



종합하면 깁슨 걸을 통해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여성 운동은 계속해서 기존의 협소한 여성성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 금지된 것들을 시도해왔다. 그리고 이 모습은 작은 변화라고 해도 기존의 이상적 규범에 흠집을 내고 균열을 내는 행동이었다. 그 결과 규범의 답습과 변혁이 뒤섞인 새로운 대안적 외양이 나타났다. 둘째, 여성이 전통적 여성상에 위배되는 특징을 포섭하고 시도했을 때, 시간이 지나면 그 특성 역시 ‘여성화'된다. 당대에는 변혁적이었을 깁슨 걸의 모습이 현대의 우리가 보기에는 매우 “페미닌”한 모습이 아닌가? 남성복이나 남성적 신체 요소가 여성의 몸에서 나타나는 순간 그것은 ‘여성화’된다. 젠더 규범에 도전하는 시도는 젠더 규범을 온전히 뒤집지 못해 포섭되기 마련이었다. 결국 깁슨 걸의 모습이 협소한 미적 기준으로, 폄하된 신여성으로, 새로운 방식의 연애와 결혼 속으로 녹아들었듯이.





글을 써놓고 발행을 잊어버려 한 주 놓쳤습니다... 글이 서랍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어제 확인했지 뭐예요... 혹시 기다리신 분이 계시다면 죄송합니다. 그리고 본래 이번 글에서 깁슨 걸과 함께 서프러제트를 다루려고 했는데, 분량이 너무 길어져서 서프러제트에 관한 내용은 다음주에 쓰도록 하겠습니다. 꾸준히 읽어주시고 좋아해주시는 분들께 늘 감사드린다는 말씀 전합니다.


참고문헌

Robinovitch-Fox, E. (2021). Dressed for freedom: The fashionable politics of American feminism.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Scott, L. M. (2005). Fresh Lipstick. Palgrave Macmillan.

박현숙. (2016). 신여성과 깁슨걸의 비교 분석. 서양사론, 128, 210-154.


표지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https://en.wikipedia.org/wiki/Gibson_Girl#/media/File:Gibson_Girl_by_Charles_Dana_Gibson.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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