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홀 아닌 워홀로 호주에서 농땡이를 피웠을 무렵, 머물렀던 집 바로 앞에는 수영장이 있었다. 연둣빛 잔디밭이 둘러 있고 밝은 햇살이 물을 파랗게 비추는 널찍한 공간이었다. 딱 한 번 가보았는데, 물에 뜰 줄도 잠수할 줄도 모르면서 물장구 치고 싶다는 생각에 애인과 둘이서 무턱대고 들어갔었다. 그리고 거기서 나름 물에 뜨고 움직이기도 하면서 물 속에서 실컷 움직이며 시간을 보냈다. 개구리 자세까지도 하고 그랬던 것 같다. 나름대로 앞으로 나아가기도 했었던 것 같고...
그로부터 6년이 지나고, 나는 이 기억을 안고 서울의 어느 수영장에 자유수영을 하러 들어갔다. 당연히 애인을 끼고. 우습게도 나는 혼자서는 이런 도전을 하지 않는다. 각자 씻고 수영장에 들어갔을 때도 애인을 발견할 때까지 나는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수영장은 내게 너무나 낯선 공간이었고 나는 여기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잘 몰랐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이다지도 의존적인 나를 정말 싫어하는데, 뭐 그렇다고 행동을 바꾸려는 용기도 없다.
레인마다 초급 중급 고급을 구분해둬서 초급 구간에 들어갔고, 나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답게 아무것도 시도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누구나 아무것도 시도하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만, 나는 언제나 그렇듯 낯선 환경에서 위축되고 굳어버렸다. 이곳의 그 어떤 규칙도 알지 못하는 상태. 내가 어떤 행동을 하든 그 행동은 튀어버리리라. 익숙하고 능숙한 사람들에게 규칙에 어긋나고 잘못된 행동은 눈에 잘 띄니까. 아니나 다를까, 한 레인 안에서도 좌우로 출발구간과 도착구간이 나뉘어 있었고 나는 다른 사람들의 통행을 방해하는 곳에 서 있었다. 우리를 지켜보던 관리자 같은 사람이 비켜줘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그제서야 깨달았다는 듯 올바른 자리로 가보았다.
어찌되었든 레인에 들어왔으니 출발은 했어야 했다. 무턱대로 해보고 자유형 자세를 해보라는 애인의 말은 솔직히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는데, 일단 고개를 처박고 허우적거려봤고, 그래서 나름 몸이 뜨긴 떴고 몸을 쭉 뻗어보기도 했다. 이렇게 내버려두다 보면 뭐가 됐든 물 속에서 움직이는 법을 적응할 것도 같았다. 아마도 호주에서도 그렇게 조금씩이나마 터득해갔겠지. 그렇게 한 번 허우적거리고 세 걸음 걷고 한 번 허우적거리고 세 걸음 걸어가며 레인 끝까지 이동했다. 그때 다시 내게 말을 거는 그 관리자 같은 분. 대강 요약하자면 이곳은 수영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이용하는 곳이니 저쪽 유아풀 가서 연습하라는 말이었다. 사람 좋은 웃음을 걸치고 다정한 말투로 말씀하셨다. 위험에 대한 우려가 깃든 말이었지만, 온전히 수긍할 수 없었다. 무언가 불편한 기분이 들었으나 기분과는 별개로 몸은 이미 그 공간의, 집단의 규칙을 잘 듣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도착한 유아풀은 70센티 정도의 높이였다. 앉아도 얼굴은 빼꼼 내밀 수 있는 곳. 거기서 연습하는 성인분도 있었지만 나는 무언가를 시도할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호주에서도, 방금도, 성인풀에서는 충분한 깊이의 물 속에서 자유롭게 허우적거릴 수 있었으니까... 유아풀에서 어떻게 움직여야 바닥에 무릎을 부딪히지 않고 움직일 수 있을지 감이 오지 않았다. 더군다나 재미있게 노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그곳은 내게 허락되지 않은 공간 같았다. 내 몸은 유아풀에서는 지나치게 크고 눈에 띄었다. 도무지 움직일 의욕이 나지 않아 한동안 멈춰서서 머뭇거리던 나는 결국 수영장을 나와버리고 말았다.
내 이야기를 전해들은 친구는 성인요금을 내고도 성인풀에서 머무르지 못하고 금방 나와야한다면 환불이라도 해줘야되는 거 아니냐고 성을 냈다. 내 소심함을 탓하는 게 아니라서 고마웠다. 아마도 내 문제점은 왕초보 주제에 강사와 커리큘럼 없이 맨땅에 헤딩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꼭 정비된 교육을 받는 것만이 물과 친해지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지 않은가? 자유수영이라고 했을 때, 나는 나름대로 방향을 지켜 움직이기만 하면 내가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든 상관 없을 줄 알았다. 호주에서는 내가 뭘 어떻게 움직이든 아무도 내게 관심이 없었고, 나는 오랫동안 실컷 마음대로 허우적댈 수 있었다. 물론 나는 그곳과 이곳의 전혀 다른 분위기를 읽을 줄 안다. 이곳에서는 좀 더 타인의 시선을 신경써야 멀쩡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이삼 초 첨벙대다가 걷고 다시 첨벙대고 걷기를 반복하면서도 뒷사람이 따라올까 끊임없이 움직였다. 이곳의 규칙을 모르는 상태에서 나름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는 뜻이다. 그러니 큰 문제는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바로 쫓겨나다니? 자유수영이란 수영할 줄 아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었나? 수영장은 누가 무엇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인가?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이용하는 공공공간에는 당연히 정해진 규칙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그 규칙을 벗어난 경우에 대한 관용이 부족하지 않은가. 모두가 제도화된 방식으로 움직여야지만 편안함을 느낀다. 정해진 순서대로 교육받은 행동만이 받아들여진다. 그렇지 않은 행동은 매우 튀고, 직간접적으로 비난을 받고, 제재를 당한다. 다듬어지지 않은 날 것의 행동은 삭제된다. 내가 성인풀에서 나오게 된 것처럼. 그렇게 나 같은 사람을 삭제한 수영장에서는 모든 것이 매끄럽게 돌아갈 것이다. 쉼 없이 돌고 도는 컨베이어 벨트처럼 그 어떤 오점과 멈춤 없이 유영하는 사람들로 채워질 것이다. 어쩌면 이 원활한 수영장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다. 제동을 걸고 불편을 일으키는 사람을 제거함으로써 이뤄내는 속도와 효율. 그곳에 서툴고 느린 초보자, 어린이, 청소년, 미숙련자, 노인, 장애인은 없다.
성인풀에서도 초급자, 중급자, 고급자의 영역을 나누어 두었으니 초급자 레인에서 서툴고 느리게 움직이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았을까. 이 사회에서 모두가 능숙하진 않아도 괜찮을 테니 누군가의 정돈되지 않은 행동도 기다릴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누구나 자유롭게 수영하고, 누구나 자유롭게 살아간다는 말이 더 유효한 의미를 갖게 되지 않을까. 우리 사회가 서툶과 느림에 너그럽지 못하다는 것이 참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