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다시, 죽음을 고찰하기

by 희량

나는 자아의 소멸을 굉장히 두려워하는 편이었다. 그게 내가 죽기 싫어하는 이유였다. 내가 사라지는 것. 아무것도 없는 그 무의 상태가 두려워서. 엄청나게 거대한 자의식을 가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이 사라지는 걸 그리 슬퍼하지 않는 듯하여.


그런데 자아의 상실 자체는 꼭 죽음만이 가져오는 일은 아니었다. 우리는 매일 수면을 통해서 자아를 잃고, 질병이나 항정신성 약물, 알코올로도 얼마든지 자아를 잃을 수 있다. 일관적이게도 난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 싫어서 마약과 알코올에 대해서도 거부감이 컸다. 불법적인 것, 폭력적인 것에 대한 거부감 그 밑 깊은 곳에는 내 자아를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 대한 거부감이 낮고 끈적하게 자리하고 있다. 오지 않는 잠을 기다리는 것도 고역이었다. 잠이 찾아올 때까지 꾸역꾸역 눈을 감고 가만히 있는 시간은 괴롭다.


어쨌든 여기서 중요한 건 내가 나를 잃는 게 생각보다 가깝고 잦은 일이었다는 깨달음이다. 나는 언제나 나로 존재하지만은 않았다. 내가 나를 의식하지 않아도 내가 있었다. 그러니까 나의 존재는 오히려 나의 생존과 죽음에 무관한 일이었다. 살아 있다고 해서 '나'의 존재가 늘 보장되는 건 아니었다. 내 입장에서 보면 삶과 죽음에는 두 가지 차이가 있는데, 하나는 내 몸이 세상에 존재하는 여부, 다른 하나는 다시 자아를 되찾을 수 있는 가능성의 여부다. 죽음은 이 두 가지가 완전히 삭제된 상태였다. 삶에서 나는 계속 나를 잃어버리지만 다시 되찾는다. 잠에 들고 깨어날 때, 술에 취하고 깨어날 때. 나는 삶 속에서 어김없이 깨어난다. 깨어낢의 가능성을 인지했을 때 느끼는 안도와 축복이란. 아침마다 이 안도와 즐거움을 깨닫는 건 아니지만, 가끔씩 잠에서 깨어난 눈을 뜨는 일이 기적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치매에 관한 글을 읽었다. 치매를 앓는 사람을 지켜보며, 과거와 미래가 아닌 현재에 오롯이 집중하는 상태에 이르렀다고 표현했다. 현재에만 집중하며 존재하는 건 어떤 감각인가. 그때의 나는 나를 의식하고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나는 온통 과거로 구성되어 있고 미래를 기대함으로써 현재 자신의 실존을 의식하는 존재다. 그런데 오로지 지금 여기 내가 느끼는 것만이 전부인 상태라면 나는 나인가? 나는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나의 기억을 배제하고 나를 말할 수는 없었다. 나의 정체성과 성격과 관계 등등 모든 걸 구성하는 기억을. 그런데 한편으로 현재를 의식하지 않고 과거와 미래라는 실존하지 않는 시간대에 머무르고자 하는 나는 '나'인가? 내가 원했던 나, 자아의 상태란 이다지도 모호했다. 나는 어떤 실존을 원하고 어떤 사라짐을 무서워하는 것일까.


나는 그저 그렇게 얄팍하고 사소한 존재일 뿐이었다.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사라진다는 것은 내가 원치 않아도 언제든지 찾아오고 언젠가는 그 상태가 영원히 이어질 것이었다. 그래도 이제 나는 내가 살아있다는 것과 내가 나를 의식한다는 것이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중이다. 나를 의식할 수 없는 상태에도 나는 살아있을 수 있고, 그렇다면 죽음과 삶이 그렇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무의식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에서부터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필연적으로 맞이할 미래를 받아들이기 위해.


나와 나의 바깥, 즉 세상의 경계는 그렇게까지 선명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가 의식하지 않을 때 나의 존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내가 나랑 일치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저 세상의 일부일 것이다. 리베카 솔닛은 "당신은 당신 자신이 아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만들어진 가장 허술한 배처럼 물 샐 틈이 많고, 삶의 대부분을 다른 누군가로 살아간다"고 말했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그렇게 견고하고 뚜렷하고 선명한 존재는 아니었다.


내가 온전히 나일 수 있는 때는 그렇게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다른 사람과의 규칙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를 억누르기도 하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할 때도 있으며, 적당히 자연스럽게 존재할 수 있는 방식의 얼굴을 만들어서 살아간다. 나는 절대적이거나 독립된 존재가 아니다. 내 일상이 이어지게끔 추동하는 동력도 내 안에 있지 않다. 그렇다면 나는 그저 부분일 뿐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 바깥 세상, 평생 읽고 들은 이야기들, 둥둥 떠다니는 이미지들이 잔뜩 침투한 거대한 세계의 일부분이다. 관계 속에서 부분으로 존재하는 게 나의 본모습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내가 철썩같이 믿었던 나라는 환상의 경계가 무너지고 완전한 부분이 되는 과정이다. 내가 독립된 존재라고 믿을 만한 모든 가능성들이 사라지고, 이 모든 세상과 우주에 녹아들어서 완전한 일부가 되는 것. 어쩌면 지금 내가 존재하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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