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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태용 Jul 05. 2024

인왕산에 올라

겨울과 여름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묘하게 겹쳐보이는 어느 봄날, 나는 산에 오르며 고요하게 피어있는 꽃 하나를 눈에 담는다. 서울 도심에서 나고 자란 나는 아는 꽃이 그리 많지 않다. 꽃의 이름은 꽤나 알고 있으나 책으로 접한 경우가 대부분이라 이름을 아는 꽃을 보고도 그 꽃이 그 꽃인지 잘 알지 못한다. 이름으로 불러주지 못하는 미안한 마음에 이리 저리 살펴보며 빛깔, 색, 내음 등 사소한 것까지 전부 살펴본다.  


흔히 눈보다 좋은 카메라는 없다고 한다. 동의하지만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카메라를 통하면 눈으로는 볼 수 없는세계를 볼 수 있다. 망원렌즈는 초점거리가 길고, 화각이 좁기 때문에 망원렌즈로 가까이 있는 꽃을 보면 뒤에 보이는 배경이 줄어들어 온 세상에 꽃 하나만 존재하는 세계가 펼쳐진다. 이 세계에서는 각각의 꽃들 하나 하나가 세계의 전부고 세계의 완성이다. 모든 잎들이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광각렌즈는 초점거리가 짧고, 화각이 넓어 광각렌즈로 꽃을 바라보면 배경이 더 넓어진다. 각각의 꽃들이 이제는 커다란 세계의 일부가 된다. 그들의 개별적인 아름다움보다는 전체적인 조화로움이 눈에 들어온다. 각각의 꽃들은 하나의 구성물에 지나지 않는다.  


렌즈 뿐이 아니라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조리개를 얼마나 여느냐에 따라, 셔터스피드를 얼마로 설정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그러니, 인간의 눈과 카메라 둘 중 어느 것이 더 낫다고 하고 그칠 것이 아니라 카메라와 눈모두 세계를 보기 위한 하나의 도구일 뿐임을 알고 적절히 활용할 일인 것이다.


나는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꽃의 다양한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다 문득 한 사람을 상상해본다. 이 산에 올랐을 최초의 누군가. 그는 왜 산에 올랐을까. 먹을 것을 찾아 왔을까 아니면 무언가에 쫓겨 왔을까. 산에 오른 이유야 어찌되었든그때는 아무 길도 없었을 것이다. 오직 미래의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는 아직 실존하지 않는 무한한 길들. 어떤 길을 선택해야할 당위도 어떤 길을 선택하지 말아야 할 제약도 없이. 마음의 렌즈를 바꿀 때마다 다른 길로 산을 오르는 그가 보인다. 그는 그중 하필 하나의 길을 올랐을 것이나 그 안에 여전히 다른 모든 길들이 살아 숨쉬고 있다. 단지 우리의 세상에, 우리의 눈에 하나의 길만 보일 뿐이다. 수많은 미래의 가능성이 현실로 수렴하여 하나의 길이 된 오늘, 이제는 길이 아닌 저 길을 마음으로나마 걷지 못한다면 나는 정말 산에 오르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나는 다시 한번 꽃을 바라본다. 꽃 한송이에도 우주가 담겨 있다. 눈에도 카메라에도 심지어는 저 꽃에도 얽매일 이유가없다. 군복 입은 사내의 품에 설레며 품겼을 사랑과 옥상 위 눈물 고인 눈에 번졌을 희망과 언젠가 차가운 비석 위에 놓였을 슬픔 하나까지. 그 모든 파동이 기적적으로 중첩되어 하필 저 모양으로 현현한 지금. 나는 다시 몸으론 길을 걸으며 마음으로 산을 오른다.  


아직 날이 밝은데 어느덧 그믐달이 선명하다. 그녀는 그믐달이 슬프다했다. 검게 사라진 달과 하얗게 숨죽인 달. 그녀를슬프게 한 건 무엇이엇을까. 나는 대답 없는 달을 바라보다 빈 하늘에 별을 그려본다. 이제 더이상 별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작은 숨을 들이쉰다.  나는 책으로 접한 여러 별자리를 그려보다 한탄한다. 별이 뜨지 않는데 별 헤는 마음이 다 무어란말인가. 별이 없는 하늘에서도 윤동주가 나올 수 있을까? 살짝 심술이 난 나는 윤동주에서 별의 파동을 슬며시 빼어본다. 그러자 무심히 대답 없던 달이 저 멀리 도심을 가리킨다. 그의 마음에서 빛나던 별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새로운 모습으로 수렴하고 있다.  


나는 분주한 별들 속에서 나의 별을 찾아본다. 혹은 나의 별이었던 것까지. 삶은 가까이서 보면 희극 멀리서 보면 비극이라고 했다. 아니,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랬던가. 몇 번을 보아도 헷갈리는 이 문장을 되뇌여 본다. 희극과 비극 사이에서 만났던 수많은 별들. 더이상 볼 수 없으리라 여겼던 별들이, 이제는 저 하늘에 떠있는 것은 아니지만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빛나고 있다. 나는 누군가에게 상처 주었던 일, 한심한 모습을 보였던 일이 떠올라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때는 내가 어렸다고, 어쩔 수 없었다고 미안하다고 변명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이 그저 그들 마음에 새로운 별로 빛나길 바라며 저 하늘에 그믐달을 바라보았다.


그믐달을 뒤로하고 내려오는 길, 눈에 보이지 않는 숨겨진 모습까지 담겠다며 살펴 보았던 꽃은 그럼에도 또 새로운 모습이었다. 오르는 길에 보았던 모든 것들이 한 송이 꽃잎에 담겨 있었다. 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었다. 꽃은 언제나 나의 온 생애로 부딪히는 것이었다.


내 앞에 펼쳐진 이 길이 어떤 강요처럼 느껴지는 어느 날, 인왕산에 오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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