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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태용 May 31. 2024

지난 봄의 풍경을 마주하며

계절의 풍경과 인생의 풍경이 어렴풋이 발을 맞춘 여름날, 잠시 숨을 고르며 지난 봄을 돌이켜본다 


얼마 전 길에서 본 백발의 노인. 곧게 펴진 허리, 반듯한 정장, 자신감 넘치는 걸음걸이와 눈빛을 보며 나도 그처럼 나이 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무언가를 드러내기에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에. 너무나도 일상적인 모습에도. 그의 모든 하루가 감출 수 없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길을 걷다 마주치는 찡그린 사람들을 보며 무엇이 그리 불만일까 참 못났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은 마흔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져야 한다는데  찡그린 얼굴 하루, 찡그린 마음 하루. 잊혀진 모든 날들의 영혼이 끈질기게 발버둥치며 그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나는 집에 돌아와, 홀로 책상 앞에 앉아 백발의 노인을 다시 한번 떠올려보았다. 그에게도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 나는 그의 과거를. 그의 과거였을 것들을 하나 하나 그려본다. 그 안의 모든 좌절과 모든 슬픔과 모든 우울과 모든 나태와 모든 권태와 모든 무기력과 모든 이별과 상실들. 그의 생각 의지 모든 결정과 아픔까지도. 


나는 누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것인가. 나는 나의 과거를 떠올릴 미래의 누군가를 상상해본다. 과거의 그가. 현재의 모습으로. 현재의 나와. 미래까지의 나와. 미래의 누군가를 만난다 


나는 문득 버지니아 울프를 떠올리며 그에게 말을 건넨다. 당신이 말한 것이 이런 것이었군요. 나는 그가 살던 세상 속으로 다시 한 번 들어가보았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은 언제. 어느 시점의 누군가에게 읽히게 될까. 버스 정류장에서 읽히게 될까? 침대에서 읽히게 될까. 무더운 여름날 읽히게 될까? 시린 겨울날 읽히게 될까. 지금은 2024년이니까 아마 모두에게 조금은다른 형태로 읽히게 되겠지?  내가 찍은 마침표는 마침표로 읽히게 될까? 아니면 쉼표로 읽히게 될까? 누군가는 나의 글에서 나의 목소리도 듣겠지 


나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당신에게 가고, 당신은 그 모든 시간과 공간을 역행하여 나에게 온다 


당신은 어떤 글을 쓰고 싶냐는 그 질문에 나는 제대로 답할 수가 없었다. 글을 쓰는 순간까지의 나의 전 생애와. 그 사이에 우리의 모든 만남까지. 그 모든 것을 품고 그때의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쓰게 되겠지 



어느덧 지나버린 봄날이, 당시엔 영원할 것 같던 그 순간들이 이제와 돌이켜보니 찰나 같다. 그러나 그 모든 순간을 담은 나와. 백발의 노인과. 버지니아 울프와. 다이애나 로즈와. 윤동주와. 이제는 또 당신까지. 우리는 또 언제.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재회하고 있을까 


슬픔. 분노. 증오. 

두려움. 그 모든 것이 부질 없다. 


2024년 서른 여섯의 서울. 여름날. 나의 하늘엔 여전히 별들이 가득하다  





Diana Ross – If We Hold On Toge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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