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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색광선 Jan 30. 2020

당신의 오로라, 나의 북유럽 11

아빠와 함께 한 핀란드, 노르웨이 오로라 여행

오슬로는 노르웨이의 수도답게 과연 북적거렸다. 중앙역 앞은 트램과 버스가 엉켜 복잡했다. 시내로 걸어갈 수도 있었지만 바닷가에 면한 노벨 센터를 먼저 방문하기 위해 버스를 탔다. 커다랗고 순한 눈을 가진 개가 같이 버스에 타서 자연스럽게 바닥에 조용히 배를 눕혔다. 도심은 복잡했지만 사람들은 평화로웠다. 노벨상 수상자들을 기념하는 노벨 센터는 특별한 것은 없었지만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고 반가운 한국인 노벨평화상 수상자의 얼굴을 만날 수 있어 한 번쯤 방문할 만했다.



노벨 센터에서 나와 대로와 연결된 소박한 왕궁을 지나 시청사로 향했다. 두 개의 브라운 치즈라는 별명이 있다는 시청은 갈색 벽돌의 소박한 건물이었다. 시청을 관광객이 들어간다는 것도 낯설지만, 더 신기한 것은 벽면 가득 노르웨이의 역사를 담은 벽화가 가득하다는 점, 그리고 어둡고 무거운 커튼이 드리워진 창문 사이로 빛이 스며드는 방들에는 그림들이 걸려있어 마치 무료 미술관 같다는 점이다. 누구나 들어와서 감상할 수 있는 개방된 공간이라는 점이 시민에게 열린 공간이라는 시청으로서의 기능을 가장 잘 살리고 있는 듯했다. 무엇보다 이곳에는 뭉크의 방이 있다. 뭉크의 그림 <인생>이 걸려있는 방인데, 이곳에서 오슬로 시민들이 결혼식을 올리기도 한다고 했다. <인생>이 걸린 곳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커플들이 부러웠다.     


시청에서 가까운 국립 미술관에는 북유럽의 햇살을 닮은 그림이 가득했다. 따스하고 환한 빛이 아니라 뿌옇고 어두운 빛. 유난히 이곳엔 푸른빛의 그림이 많다. 피카소의 검은 피오르드 빛깔의 커플 그림과 붓 터치가 정갈하고 매끄러워 어스름한 저녁이 미끄러질 듯한 함메르쇼이의 그림, 그리고 당연히 뭉크의 그림들. 죽음이 드리운 회색 빛 얼굴들, 어둠 섞인 초록빛 배경과 산, 검은빛을 먹어 한층 무거운 보랏빛 드레스, 유명한 <절규>보다는 낯선 다른 그림들이 한층 먹먹하게 다가왔다. 오슬로의 겨울 하늘을 닮은 회색과 검은빛과 습기 가득한 구름과 안개의 무게가 그림에 어려 있었다.      


거리로 나오니 이곳 거리의 중심에도 크리스마스 마켓이 한창이었다. 뭉크의 그림처럼 어둡고 회색의 축축한 도시였지만, 이곳에도 사람들이, 아이들이 생기 있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점심은 핀란드의 실내 시장과 비슷한 마탈렌 시장에서 간단히 먹었다. 강변에 면한 시장은 벽돌로 지어져 있고 규모는 헬싱키의 그것보다 훨씬 컸다. 식재료들이 큼직큼직하게 놓여 있고, 한가운데에는 이곳에서 산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테이블도 마련되어 있다. 노르웨이 사람이 만드는 스시와 연어, 고등어를 이것저것 샀다. 입구에는 노르웨이의 유명한 커피 로스터인 솔버그 앤 한센의 매장이 있어, 이곳에서 커피 원두를 샀다. 종류가 다양하고, 각종 티와 초콜릿 등도 구비되어 있어 고르기가 힘들었다. 바에서는 손님과 직원이 담소하고 있어 조용히 크리스마스 블렌드를 골라 나왔다.    

  


시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랑하는 팀 윈들보 커피 매장이 있었다. 한국에서도 서브스크립션으로 매달 만나는 커피이지만, 이곳에서 팀의 바리스타들이 만들어주는 커피를 꼭 맛보고 싶었다. 이미 어두워진 골목길을 걸어가자 작은 공원 옆 익숙한 하얀 외관의 매장이 보였다. 바리스타 챔피언이자 직접 커피를 소싱하며 커피 농가와 교류하고 협력하는 이들의 활동과 커피 철학이 오랫동안 마음에 들었던 터라 외관만 봐도 마음이 설레었다.

마침 어떤 행사가 있던 탓인지 카페는 북적였고, 팀은 사람들과 대화에 여념이 없었다. 자리가 나지 않아 먼저 바에서 한 잔 마실 요량으로 에스프레소를 주문하고 자리를 기다렸다. 나무 바닥에 네다섯 개의 테이블이 있는 작고 아담한 가게에서 여섯 명 정도의 직원들이 바쁘지만 활기차게 움직였다. 엄청나게 바빴는데도 미소를 잃지 않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의 커피를 정성 들여 만들어주었다. 그라인더를 세팅하는 데 상당히 공을 들인 후 완성되어 나온 에스프레소는 상당히 양이 많고 진했다. 온두라스에서 재배한 SL28커피는 지난달에 받아서 맛본 커피였지만 이들이 만들어  주는 커피는 훨씬 바디감이 좋고, 상큼한 맛과 거칠고도 플라워리한 아로마가 좋았다.


자몽 같은 신맛과 쓴맛이 적당히 어우러진, 진하고 쨍한 여운이 오래가는 커피를 음미하고 있다 보니 바리스타가 가까이 와서 커피는 어떤지 물어봐 주며 설명을 더한다. 마치 과일 폭탄 같은, 복잡하고 깊은 맛이라는 설명에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동감했다.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동안 자리가 나서 싱글 브루잉을 한 잔씩 더 주문했다. 주문을 받는 바리스타는 커피를 재배한 환경이나 커피의 특성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게이샤 커피를 브루잉해 주었는데, 맑고 부드럽고 약한, 플라워리하면서 초콜릿 같은 달콤한 향이 애프터테이스트에 가득한 복잡 미묘한 맛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 라테 파파들이 유모차를 밀고 들어와 직원들과 담소를 나누며 커피를 주문해 가기도 하고, 처음 오는 나 같은 동양 관광객들이 연신 카메라를 들이대며 갖가지 커피를 종류별로 주문하기도 했다. 마치 바처럼 편안하게 한둘이 담소를 나누며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도, 아이와 함께 온 사람들도 있었다. 몹시 바빴지만 직원들은 한 명 한 명에게 그냥 완성된 커피잔을 내려놓는 대신 한 잔에도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려 애썼다. 낯선 동네에서 만난 반가운 커피집은 생각보다 훨씬 아늑하고 친근한 곳이었다. 커피 자체보다 자신들의 노력과 경험과 커피를 통한 즐거움을 전달하는 기쁨이 그대로 전해지는 곳이었다.      


마지막 밤은 아빠를 위해 한식집으로 정했다. 열흘 동안 간간이 한식을 만들어 드렸지만 아무래도 인스턴트식품으로는 부족했을 터, 내일의 긴 비행을 위해서도 힘을 비축해야 한다. 시내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한식집은 오래전 이곳에 정착한 한국인이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한국식 맛은 그대로였지만 세련되고 아늑한 곳이었다. 김치찌개와 아주 비싼 소주를 두고 아빠와의 여행 마지막 밤을 보냈다.

    


헬싱키의 아파트먼트에선 밤이 깊도록 아빠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었다. 내가 모르는 내 이야기, 내가 모르는 젊은 시절의 아빠 이야기. 나는 모르던 나 자신을, 그리고 내 기원을 조금은 비밀스럽게 엿본 것 같았다.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할 수 있었을 아빠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각자의 인생의 어떤 부분에서 우리는 함께 했고, 가족이라는 각별한 사이였으며, 또 어떤 때에는 누구보다 먼 사이이기도 했다. 함께 지내면서 마음이 따로인 적도, 따로 살면서도 마음은 함께인 적도 있었다. 내가 모르는 이야기들이 수없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 못하고 남겨둔 이야기들도 많을 것이다. 다 들으려 욕심내지는 않았다. 그저 지금 우리가 또 함께 하는 시간을 다음의 이야깃거리로 남겨두리라. 함께 하는 시간이 내 어린 시절만큼 많지는 않지만, 그때보다는 아빠와 나는 서로를 좀 더 알 수 있게 되었다고 믿고 싶다. 길고 때론 힘겹고 지루한 여행이었을지라도, 나쁘진 않았던 것 같다. 나에게, 그리도 아빠에게도 그랬으면 좋겠다.




겨울 북유럽 여행자를 위한 소소한 여행 팁 11.     

부모님과의 여행은 혼자, 또는 친구와의 여행과는 다르다. 먼 곳에 왔으니 많은 것을 보고 싶고, 최대한 많은 곳을 다니고 싶지만 부모님의 체력은 딱 하루 만 보가 한계. 아무리 볼거리가 많은 대도시라도 피곤하면 만사 귀찮은 법이다. 북유럽 겨울은 낮이 짧아 오전에 서너 시간 움직이고 호텔에서 쉬다가 저녁식사를 하고 산책 또는 오로라 투어를 하는 것이 적당하다. 오로라 투어를 하는 날에는 낮 일정을 최대한 줄여 체력을 비축해야 한다.

핀란드 사리셀카나 노르웨이 트롬쇠 등 오로라 도시에서는 주로 로컬 투어를 이용하거나 주요 명소를 도보로 이동하고, 헬싱키나 오슬로 등 대도시에서는 부모님이 관심을 가질 만한 관광 명소 한두 군데 정도가 적당하다. 헬싱키에서는 헬싱키 대성당과 마켓, 수오멘린나 요새, 오슬로에서는 시청, 노벨 센터, 국립 미술관을 관람했다.  

부모님은 아무래도 패키지 투어에 익숙하시다 보니 조용히 사색하고 즐기는 것보다, 배경지식을 많이 듣고 남겨 가기를 원하신다. 유명한 관광지로 모신다고 다 끝난 것이 아니라, 역사적 배경이나 생활상, 문화나 유래를 가이드만큼 많이 공부하고 이야기해드려야 여행 온 보람을 느끼실 것이다. 여행 전 북유럽에 대한 책을 최대한 많이 보고, 나라별 역사, 중요 유적지, 관광지 등을 추려서 보시기 편하게 가이드북을 따로 만들어 드리는 것도 여행 전 기대와 즐거움을 한껏 높일 것이다. 여행 전 그날의 일정, 이동 거리, 음식, 준비할 것 등을 상세히 설명해 드리고, 정리한 내용은 PDF 파일로 핸드폰에 저장해 가거나, 프린트해서 함께 보며 여행하면 서로 힘들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여행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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