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지연 작가의 <그곳을 바라보다>는 제3의 눈을 통하여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도시를 바라보는 시선을 담은 작품이다. 도시는 시골에 비해 살면서 극복해야 하는 부정적인 대상처럼 여겨지지만, 정작 우리는 매일 그곳을 터전 삼아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다.
한가로운 시골 풍경 대신 우리가 지금 밟고 서있는 도시의 현재를 ‘네’ 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원하는 대로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삶을 한 발짝 뒤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송 작가의 작품은 이미지만으로는 전달이 잘 안 되는 아쉬움이 있다. 작품은 꼭 실물로 봐야 한다.
감상할 때는 앞 뒤로 발걸음을 옮겨가며 두 가지 방법으로 보게 된다. 가까이서 그리고 몇 발짝 떨어져 멀리서.
가까이서 보면 단조롭고 빽빽한 겹겹의 추상화로 보인다.
멀리서 보면 마치 조각 작품 마냥 두터운 마티에르 (물감층)를 품은 형상이 갖추어진 도시의 모습이다.
작품은 단시간에 완성되지 않았다. 스케치 그림을 그린 후, 물감으로 이전 작업을 다 뒤엎는다. 그리고 그 위에 새 그림을 얹는다. 다시 물감으로 지운다. 그 위에 새로운 색깔로 덧칠한다.
그리고 지우고의 반복을 통해 자신에 대한 성찰과 반성의 흔적을 그림에 남긴다. 수 차례의 붓질 속에서 나의 시선과 타인의 시선이 중첩된다.
중첩된 시선은 제3의 시선을 탄생시킨다.
작가의 작품에는 사람이 없다. 사람의 표정이 아닌 시대를 반영하는 건물을 통해 객관적으로 사람들의 표정을 담고 싶었다며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소개했다. 뭔가 쇼킹하고 독특한 것들을 요구하는 현대미술의 요란한 분위기 속에서 작가는 가장 자신이 익숙한 것이 도시의 풍경이었기에 그것을 인정하고 소재로 삼았단다.
내가 아닌 것, 지금의 삶과 동 떨어진 것은 왠지 자신의 세계가 아닌 것 같아 빽빽한 도시를 그린다고 했다.
혹자는 그림에 숨 쉴 틈이 없다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앞뒤로 발걸음을 부지런히 옮겨서 작품을 살펴볼수록 보는 맛과 여유를 찾을 수 있는 작품이다. 마치 허점과 실수투성이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미안, 다음부턴 더 잘할게’라고 쿨하게 인정해 버리면, 더 많은 관점들이 선물처럼 찾아오듯이 말이다.
램프의 요정 지니가 묻는다.
“당신의 소원이 뭐죠? 딱 한 가지만 들어줄 수 있어요.”
20~30대에 이 질문을 받았다면 대답을 찾느라 한참을 고민했을 것이다. 소원이 세 개가 아니라 한 개만 들어준다고 했기에 삼자 택일하는 일이 쉽지 않았으리라. 40대의 나에게 램프의 요정이 이런 질문을 준다면 나는 주저 없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나에게 제삼자의 눈을 줘. 나를 내가 아닌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제3의 눈을 말하는 거야.”
언젠가부터 타인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메타인지를 갈망하고 있었다. 나로부터 분리되지 않은 시선 때문에 뇌의 일부가 오류를 품은 채 작동되기도 했다. 내가 만들어 낸 허상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각자가 만들어낸 허상에서 살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 허상이 삶을 지탱하는 간헐적인 지지대 역할을 할 때도 있지만,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굴절된 안경이나 마찬가지였다. 굴절된 세상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보다 많은 걸림돌에 넘어지게 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불필요한 오해를 쌓게 했다.
인생은 문제의 연속이다.
그저 늘 순조롭고 평탄하길 원했지만 단 하루도 문제가 없는 날이 없었다. 오늘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해서 내일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도마뱀의 꼬리처럼 자르면 무한 재생을 반복하는 것처럼 문제는 매번 다른 모양으로 증식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빨리 종결시키고 싶었다. 시간이 걸리는 문제도 해결이 되지 않으면 다른 일을 하지 못할 정도로 일단 문제를 종결시키는 데 집착했다. 문제가 없는 순백의 상태를 갈급했다.
문제가 있는 삶을 인정하지 않을수록
문제의 번식력은 더욱 왕성해졌다.
제3의 눈이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시간을 필요로 하는 문제도 인내심을 갖고 차근차근 지혜롭고 객관적으로 풀어가는 시선. 이 눈은 내 고집대로 상황을 끌고 가지도 않을 것이고, 겁먹는 데로 주저앉게도 하지 않을 것이다.
제3의 눈은 이렇게 조언할 것이다.
“지금 상황이 불편하죠? 회피하고 싶죠? 당신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하고 싶지요? 그런데 이건 어떤가요?
두 눈 크게 뜨고 딱 한 번만 상황의 한가운데 발을 담가보는 것. 당신이 추측하는 것처럼 그렇게 무섭지 않을 거예요. 진실은 말이에요. 그들도 당신처럼 두려워하고 있다는 거예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허점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인정을 해버렸기 때문에 상대방이 더 이상 왈가왈부할 거리가 없어진다. 이 사람은 문제 앞에 놓인 가장 큰 산을 넘었기에 신의 눈을 가지게 됐다. 자신이 잘 못 그린 그림일지라도 물감을 쫙 뿌려 그 위에 새로운 그림을 담담하게 그려낼 수 있는 사람이다.
램프요정 지니는 소원을 들어주다 말고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니 당신은 원래 제3의 눈을 가지고 있어요.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서 퇴화됐을 뿐이에요. 당신한테 없는 것으로 한 가지를 말해봐요. 그것을 들어 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