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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Movie)처럼 설득하기.

영화에서 배우는 설득 커뮤니케이션

by Raymon

본 글에서 언급되는 영화에 대한 설명은 지극히 필자의 부족한 지식과 식견으로 해석한 개인적 의견임을 밝힙니다.


Instagram : https://www.instagram.com/raymon_sy/


넷플릭스도 왓차플레이어도 없던 그 옛날, 주말의 명화에서 때지난 더빙영화를 보거나 비디오를 대여하는 것 외에, 따끈따끈한 개봉 영화를 볼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극장 개봉관을 가는것 뿐이었다. 그 시절, 시험기간이 끝나면 친구들과 모여 종로3가와 충무로 인근을 돌아다니며 두세편의 영화를 연달아 보고 저녁 늦게 귀가하곤 했었는데 그런 다음날 나는 친구들에게 어제 본 영화를 실감나게 들려주었다. 내 이야기에 초롱초롱 집중하는 친구들의 표정에서 묘한 우월감과 뿌듯함을 느끼곤 했었는데 아마도 내가 멋진 스토리텔러가 된것 같은 기분이었던 것 같다. 영화의 스케일이나 배우들의 감정들을 실감나게 전달하는 나의 입담도 한 몫을 했겠지만 그것 외에도 나에게는 나름의 전략(?)이 있었다. 가끔은 영화를 본대로, 시계열적 흐름에 충실히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순서와 구성을 조금씩 바꾸는 경우가 있었는데, 친구들이 그 영화에 기대하는 중요한 지점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경우가 그랬다. 가령 과거를 잊고 조용히 살던 주인공이 복수의 화신으로 변하게되는 결정적 사건이나 등장 씬이라든가, 기상천외한 대반전이 일어나는 영화의 마지막 결론 부분 또는 주인공인 유명 배우의 화끈한 액션장면 같은 것들이었다. 친구들이 기대하는 그 장면을 최대한 드라마틱하게 전달하기 위해 내 나름의 편집을 감행 했던 것이다. 때로는 친구들의 주목을 끌고 열광적인 리액션을 위해서라면 일부러 약간의 스포일러를 흘려두는 것도 꽤 괜찮은 방법이었다.

나는 영화의 줄거리를 들려주려는 화자(Storyteller)의 입장에서 청자(Listener). 즉 친구들의 관심사를 이용하여 내용의 전달 방식(Plot) 조금 바꾼 것이다. 이야기가 담고 있는 사실(Fact)은 달라진 것이 없다. 다만 상대가 '관심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구성을 조금 바꾸고 특정 내용을 강조함으로써 이야기의 수용도를 높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전달방식의 기술은 일상적 커뮤니케이션 상황에서도 자주 발휘된다. 상품기획팀 박팀장의 보고 내용은 이해는 되지만 늘 '뻔한 얘기'인것 같고, 디자인팀 김팀장의 보고는 늘 '그럴 듯'하고 '말이 되는'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하나의 주제와 내용을 가지고 있더라도 구슬을 어떻게 꿰어 내느냐, 다시말해 어떤 방법으로 전달하느냐에 따라 듣는 사람의 설득과 공감의 차이를 만드는 것이 스토리텔링의 힘이다.

필자는 UX(사용자경험) 분야에서, 대기업 고용주를 위해 일하는 소위 '월급쟁이'다. UX Designer(또는 Researcher)는 사용자 중심 Interface를 설계하고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의 UX 방향성을 제안하거나 UX 관점의 신사업 기회를 탐색하는 일을 맡고 있다. 하지만 사실 그보다 더 일상적으로 회사에서 내가 하는 일의 대부분은 그 일과 관계된 사람들을 '상대하는 일'이다. 설명하고, 보고하고, 논쟁하고 설득하는 것이 일상다반사의 '일'인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어쩌면 일을 잘(?)하는 것은 세상에 없던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내는 것보다 수많은 이해 관계자들에게 아이디어의 가치를 관철시키고 그것이 세상에 '나오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위인전은 위인이 탄생 해야만 써질 수 있는 것처럼 세상에 나온 아이디어만이 혁신이 되는 법이니까.

매일의 업무현장에서 나와 다른 시각과 생각을 가진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을 상대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모자람이 없어 보이는 내 설명이 상대에게는 번번히 '안되는 이유'들만 가득한 논리로 전달되곤 한다. 안되는 이유들을 상쇄할 만한 자료와 설명을 보태어 보지만 여전히 긍정적인 답을 얻기란 쉽지 않다. 상대는 마치 처음부터 곱게 들어주지 않으리라 작정하고 그 자리에 온 듯하다. 결국 나도 '하기싫으면 관둬'라는 심정으로 미팅은 마무리 된다. 우리는 업무 현장에서 이와 같은 '사자신랑과 소아내 이야기'와 같은 불통의 상황을 자주 경험하고 목격할 수 있다.


사자신랑과 소아내 이야기
어느날 숫사자와 암소가 깊이 사랑에 빠져 결혼하게 되었다. 사자신랑은 사랑하는 소아내를 위해 새벽같이 일어나 사냥을 하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싱싱한 고기로 아침상을 차린다. 소아내는 입도 대지 못하고 다음날 내가 제대로 솜씨를 보려주겠노라 결심하고는 아침이슬이 채 마르지도 않은 싱싱한 들풀로 가득한 아침상을 차린다. 사자신랑 역시 굶는 수 밖에 없었다. 둘 사이의 불통의 골은 깊어지고 결국 헤어지게 되는데, 돌아서는 상대에게 둘은 같은 말을 한다. "나는 정말이지 상대를 위해 최선을 다했어"


이러한 불통은 '내가 할수 있는 최선'에 집중하느라 '필요한 작은 것'을 간과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개인과 조직별 이기심이 모여 그들 간의 장력(張力, Tension)에 의해 유지되는 곳. 그것이 회사라는 공동체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좋은 커뮤니케이션은 '나'보다 '상대'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그 시절 친구들이 내가 들려주는 영화에 기대하는 지점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던 나는 내 마음대로 줄거리의 순서를 편집해서 전달 할 수 있었던 것 처럼. 우리의 업무환경에서도 단순히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닌 상대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되려면 그에 맞는 편집이 필요하다. 그 편집의 궤(軌)를 우리는 '스토리텔링'이라고 한다.

영화는 스토리를 기반으로 전개되는 연출된 영상의 모음이다. 그 안에는 관객을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여 이해시키고 상황과 감정에 공감하도록 하는 다양한 영화적 기법이 사용된다. 나는 그러한 기법들이 우리의 일상적 커뮤니케이션 상황에 많은 힌트를 줄 수 있다고 믿는다. 영화가 스크린 속에서 설정된 이야기와 상황을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우리의 업무 환경에서 벌어지는 '전달'과 '수용'의 관계에 대입하고, 우리가 매일 만드는 PPT보고서 작업으로 해석해 보면 어떨까. ‘일’로서 우리의 커뮤니케이션이 단순한 ‘내용 전달’에 그치는 불통의 커뮤니케이션이 아닌 상대를 이해와 공감으로 설득할 수 있는 소통의 커뮤니케이션으로 풍부해지길 기대한다.



<다음 - 재미있는 영화는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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