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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영화는 '발견'된다

평가는 완성됐을 때 보다 발견되었을 때 이루어진다

by Raymon


Instagram : https://www.instagram.com/raymon_sy/


친구들 앞에서 멋진 스토리텔러인양 코스프레를 할수 있게 해주던 나의 ‘영화보기’는 성인이 되어서도 몇 안되는 나의 여가 활동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특별한 취미생활이랄게 없던 나에게 영화보기는 다행히도 소개팅 자리에서 “취미가 뭐냐”는 질문에 대답거리를 제공해 주는 정도의 소재가 되어 주었다. 오랫동안 많은 영화를 보아 오면서 자연스럽게 나만의 ‘선호하는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어떤 영화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단순히 영화 장르 - 드라마, 로맨스, 미스테리, SF, 액션 등 - 로 퉁쳐서 대답하기에는 꽤 다양한 영화들이 나의 ‘선호하는 영화’쪽에 분류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분류 속에는 오래된 고전 영화도, 최신 마블(MARVEL) 영화도 있었고 미스테리도, 판타지도, SF영화도 속해 있었으며, 반면 사람들이 열광하는 수백만 흥행 블록버스터 영화는 빠져 있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문득 나의 ‘선호 영화’의 기준은 대중적 흥행(관객수)과 다른 어떤 기준이 있다는 것이 궁금하기 시작했고 나의 영화적 ‘취향’은 무엇인지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내가 대단한 영화광이나 영화에 대한 전문적 식견과 기준을 가지고 평론을 구사하는 수준은 절대 아니다. 다만 영화를 단순히 시간 죽이기(Killing Time)를 목적으로 쳐다(?) 보는 것에서 조금 더 스크린 뒤쪽으로 가까이 다가가 영화를 뜯어(?) 보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영화 자체를 구성하는 요소들 - 이야기, 전개방식, 상황을 설정하고 (관객에게)전달하는 방법, 배우의 연기력 등 - 에 의미를 이해하고 싶어졌고 또 그러한 이해가 ‘영화 보기’를 더 재미있게 만들어준다는 것에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을 뿐이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상업영화를 만드는 이 세상 모든 감독님들을 천재라고 생각한다. 천만 흥행 영화이든 흥행에 참패한 영화든 중요하지 않다. 영화 한 장면을 만들기 위해 앞에서 언급한 그 많은 (영화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동시에 고려해서 하나의 맥락화된 시퀀스로 영상화(化) 한다는 것은, 즉 동시에 수많은 차원(Dimension)의 시각으로 그 장면을 바라 볼 수 있는 능력은 분명 천재적인 재능이 아닐 수 없다. 적어도 내 상식에서는 그렇다.
그렇다면 그런 ‘천재들’이 만든 그 모든 영화들은 왜 모두 대중적 흥행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걸까. 왜 어떤 영화들은 나의 ‘선호하는 영화’ 폴더에 저장이 되고 또 어떤 영화들은 ‘그렇지 않은 영화’로 분류되는 것일까. 왜 천만 관객을 열광시킨 영화가 내 영화적 취향으로는 그저 ‘화려하거나 신기한 영상 볼거리’ 정도로 인식되는 것일까.

그 이유 중 하나로 나는 관객의 ‘스키마적 공감대(Schematic Sympathy)’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말그대로 영화를 보는 사람의 배경지식, 즉 관객의 직/간접적인 경험과 축적된 지식에 의해 만들어진 수용의 틀(Schema)이 영화의 이야기와 배경, 사건이 벌어지는 상황과 배우의 감정, 때로는 감독의 메시지에 깊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게 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차이를 만들어, 누군가에게는 영화 속으로 깊이 몰입하여 울고, 웃고, 분노할 수 있게 하지만 다른 이에게는 시시하거나 허무맹랑한 ‘지어낸 이야기’쯤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영화 '화산고' - 2001, 김태균

2001년 12월에 개봉한 김태균 감독의 영화 <화산고>는 화산고등학교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액션 무협 활극이다. 영화 속 배경은 고등학교지만 여느 학원물이 아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고등학생들은 모두가 무림고수이다. 학교 내에 숨겨진 ‘사비망록’이라는 희대의 무림비서를 차지하기 위해 벌어지는 배우들의 액션과 컴퓨터 그래픽 효과는 단연 이 영화의 볼거리이다. 이 영화는 마치 한편의 무협 만화를 보는 듯하다. 만화의 황당무계함과 돌발적 상황전개로 가득하다. 만화적 전개가 낯선 사람들에게는 그저 ‘화려한 볼거리, 빈약한 네러티브’로 치부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 2004, 유하


2004년 1월에 개봉한 유하 감독의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는 1978년 말죽거리를 배경으로 선생들의 폭력과 학생들간 세력 다툼으로 악명높은 정문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학원물이다. 주인공인 모범생 현수와 학교짱 우식 그리고 선도부장 종훈과의 팽팽한 신경전이 영화 전반의 긴장감을 이루고 있다. 전문적인 액션 기술이나 기교없이 리얼하게 그려낸 ‘싸움 씬(Scene)’과 그 시대 대한민국 학교의 진실, 그 안에 갇힌 십대들의 일상과 일탈의 모습들이 사실적이고 박진감 있게 연출된 영화라는 평을 받고 있다.



두 영화는 모두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고등학생들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영화를 구성하는 요소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배우들의 '액션'을 훌륭한 볼거리로 제공한다는 (액션)장르적 유사성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굳이 한쪽은 판타적인 속성과 효과를, 다른 한쪽은 사실적 드라마 장르의 속성을 차용했다는 점을 차치하고라도 이 두 영화는 관객의 경험과 지식에 의해 선호와 비선호로 나뉠 수 있다. 관객은 영화가(정확히는 감독이) 준비해놓은 이야기의 배경과 캐릭터, 상황 설정 등 일련의 에피소드와 연출 방식을 통해 전개되는 사건과 무드로 자연스럽게 유입되어 공감각적으로 ‘설득’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이야기에 설득이 된다는 것은 관객이 가진 기존의 경험과 지식의 범위 혹은 틀(Schema) 내에서 ‘이해되고 받아들여 믿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영화가 '재미있다'와 '재미없다'로 인식되기 이전의 단계를 말하는 것이다.

비현실적인 초능력을 발휘하는 괴짜 고등학생 캐릭터에 만화적인 황당무개한 설정과 내용 전개가 스크린 앞에 앉은 내 경험의 틀 안에서 그것이 '꽤 그럴싸한 이야기'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경로(Path)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총알처럼 날아다니는 분필도, 어느날 번개 맞고 얻게 된 주인공 경수(장혁 분)의 무공도 공감(설득)되지 않는 이야기 구성(논리)일 뿐일 것이다.

영화는(특히 상업영화는) 결국 관객에 의해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다. 영화를 만드는 쪽은 그 결과에 승복 해야만하는 운명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의 시각에서 재미있는 영화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영화가 주는 시간적(or 시대적), 공간적 설정을 이해하고 이야기의 상황 속으로 한발자국 공감해 들어가 보면 눈과 귀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영화의 깊은 맛(?)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물론 관객이 한 영화를 깊이 공감하고 감명을 받기 위해 필요한 경험과 지식을 쌓아야 한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다만, 영화 한편이 모든 관객의 '경험적 스키마'를 고려해서 만들어질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만약 어떤 관객이 영화가 주는 그 만의 의도과 메시지 그리고 재미와 감동을 느끼며 기립 박수를 칠수 있는 것은 그 관객이 영화의 배경과 이야기, 설정된 상황과 배우의 감정에 대한 '경험적 스키마'를 가지고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그것이 장풍 쏘아대는 고등학생들 이야기든, 내 고등학생 시절의 진지함과 풋풋함을 떠올리게 하는 사실적 이야기든 상관없이 말이다.


관객은 결국 보고싶은 대로, 듣고싶은 만큼 받아들일 것이다. 우리의 업무 현장에서 내 보고서가 설득해야하는 상대도 그럴 것이다. 그들 역시 듣고싶은 말만 들을 것이고 자기만의 사고의 틀에서 이해할 것이다. 그런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 내가 하고 싶은 말만 주장한다면 불통의 상황은 반복될 것이다. 좋은 설득 커뮤니케이션은 '상대'의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다. 때론 '주장'이 아니라 '논의'의 장(場)을 만들고, 주어를 '나'가 아닌 '우리' 또는 '당신'으로 바꿀 수 있다. 나와 상대를 포함하는 프레임(Frame)을 제시하여 동질감을 유도하거나 더 큰 목표로 이슈를 재정의하고 '함께'라는 공범효과를 유도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사실'보다 '이야기'를 좋아한다. 책 <사피엔스, Sapiens>의 저자 유발하라리는 사피엔스, 즉 인간만이 가진 유일한 특징은 "언어를 통해 허구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공통의 믿음으로 발전 시키는 능력"이라고 했다. 기업이나 국가, 전설, 하느님도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책 <미술에게 말을 걸다, 이소영 저>에도 '스토리'의 중요성에 대한 언급이 있다.


스토리는 오래전부터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가는 힘을 지녔습니다. 예수도 제자들에게 이야기할 때 우화와 비유를 활용했고, 셰에라자드는 천 하루 동안 왕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어 죽음을 면하지 않았던가요? 대중들은 브랜드 심벌과 함께 스토리를 기억하기 때문에 브랜드에 얽힌 사연이나 심벌이 지닌 스토리는 중요합니다.[미술에게 말을 걸다, 72p]


영화도 어쩌면 자신이 발휘한 상상력을 어떻게 하면 그것을 처음 접하는 관객에게 최대한 흥미롭게 전달할 수 있을지를 고민할 것이고, 그에 적합한 다양한 설득적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사용할 것이다. 영화는 수없이 많은 주제와 메시지를 담아낸다. 일상(日常), 사건, 역사, 신화, 종교, 철학 때론 터놓고 말하기 어려운 금기(Taboo)들까지. 거기에 스토리를 입히고 그 만의 전달방식(화법, 話法)으로 관객에게 말을 한다. 무엇을 먼저 말할지 결정할 것이고, 어느 부분을 더 강조할지도 계획할 것이다. 강하게 주장하기도 하고, 조용하고 서정적으로 독백하듯 말하기도 한다. 그러한 스토리와 영화적 화법이 관객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면, (앞에서 설명한 관객의 경험적 스키마 안에서)관객은 그 주제와 메시지를 쉽게 받아들여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영화가 관객에게 '스토리텔링'을 통해 '메시지'를 '공감’으로 ‘설득'하는 과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그런 영화적 화법(話法)에 초점을 맞추어 그 흔적들을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적인 커뮤니케이션 상황, 특히 업무현장에서 벌어지는 설득적 화법으로 치환하여 해석해보고는 것이 재미있다. 제목, 배경 및 목표, 사례조사, 시사점, 결론으로 구성된 우리의 보고서에 그럴싸한 가설을 더해 스토리를 부여해 보면 어떨까.



<다음 - 문제를 보는 관점 "왜냐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