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처럼 설득하기] 아이디어가 아닌 관점 부재의 시대
회사에서 일을 하다보면 좋은 아이디어가 늘 넘쳐난다. 박책임이 낸 '메타버스 아이디어'도 재미있고, 김선임이 얘기한 '커넥티비티 아이디어'도 그럴듯 하다. 아무리 봐도 아이디어가 없어서 혁신이 일어나지 못하는 것 같지 않다. 그럼에도 회의실에서는 오늘도 좋은 아이디어를 구하기 위한 아이데이션 회의가 한창이다. 매일 아이디어를 쏟아내지만 우리는 또 매일 아이디어를 필요로 한다. 이쯤에서 그렇다면 '좋은 아이디어'란 도데체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좋은 아이디어란 어쩌면 세상에 없던, 무릎을 탁! 치며 소름이 돋을 만큼 신기하고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아니라 현재의 나와 내 동료들이 그것을 ‘해야 할 일’로서 바라볼 수 있고, 그에 맞는 실행 계획을 제공해 줄 수있는 바로 '내 것으로 보이는 아이디어'인지도 모르겠다. 또한 아무리 좋은 기획안이라 할지라도 경쟁사에게도 똑같이 좋은 아이디어라면 그 역시 쓸모가 없다. 설득을 위한 논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의도와 주장이 빠진 논리는 그저 ‘사실의 나열’일 뿐인 경우가 많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아이디어는 '정답'이 아닌 '명답'이 돼주는 아이디어가 아닐까. 우리가 처한 상황, 잘할 수 있는 것과 허황된 것을 잘 알고 그에 맞는 배경과 논리로 ‘해야할 일’과 ‘할수 있는 일’로 해석되는 아이디어이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는 ‘아이디어의 부재’가 아니라 아이디어를 바라보는 '관점의 부재’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다, 즉 어떤 아이디어(What)를 발상해내는 것보다 아이디어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설명(Story)할 수 있느냐가 우리에게 필요한 역량이 아닐까. 그런 이야기의 궤(軌)를 바로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라고 한다.
(그림에서와 같이)과거 전통적인 커뮤니케이션 이론에서는 전달자에 의한 메시지가 수신자에게 도달하는 과정이 다분히 일방향적인(Push) 개념이었다. 광고나 미디어 분야에서도 주로 불특정다수의 수신자를 대상으로 단방향 메시지(또는 컨텐츠)를 전달(송신)하는 방식이었지만, 정보와 컨텐츠가 넘쳐나는 지금의 디지털 환경에서는 커뮤니케이션의 주체는 전달자가 아닌 수신자가 된지 오래다. 광고쯤은 스킵(Skip)하거나 원한다면 약간의 비용을 지불하고 아예 보지 않을 수 있고, 영상 컨텐츠는 보고싶는 부분만 잘라 볼수 있게 되었다. 최근 대부분의 서비스에서 고객 하나 하나의 취향에 딱맞는 메시지나 컨텐츠를 제공하기 위해 빅데이터를 수집하고 개인화를 위한 인공지능 기술 투자에 열을 올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가 일하는 업무환경에서의 커뮤니케이션 역시 다르지 않다.
회사는 아이디어만큼이나 많은 정보들이 수집되고 재생산되는 곳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매일 누군가를 이해시키고 설득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주 ‘내가 하고싶은 얘기’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데 급급하다. 자신의 얘기만을 주장하는 것은 대부분의 실패한 보고나 불통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상대를 내얘기에 귀 기울이게 하고 공감을 일으키고 싶다면 '나의 주장'보다 '상대의 관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회사라는 곳이 어쩔수 없이 서로의 '이기심의 장력'에 의해 유지되고 움직이는 공동체라는 것을 알게된다면, 나의 주장을 전달하기 전에 상대의 이기심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에 공감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이 스토리텔링의 출발지점이 된다면, 나의 프리젠테이션은 상대의 공감을 일으키는 설득적인 주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회사에서는 주로 ‘보고서’라는 형식의 슬라이드(Slide)를 통해 공식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데, 보고서를 통해 중요한 사실(Fact)과 현상들이 공유되고 문제점을 드러내거나 시사점(Insight)과 제안이 이루어지며, 이를 통해 회사의 크고 작은 의사결정이 일어나는 것이다. 보고서는 한마디로 '회사의 중요한 현안을 둘러싼 다양한 조직의 이기심을 담아낸 의사결정권자와 실무자 사이의 소통수단'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필자가 오랫동안 ‘보고서’라는 그 소통수단을 작성하면서 경험했던 많은 크고 작은 시행착오와 성공경험을 통해 얻은 한가지가 바로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이다. 내가 ‘주장하고 싶은 메시지’를 상대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전달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업무 현장에서 깨달은 ‘스토리텔링’이다. 그러한 스토리텔링 방식에 많은 영감과 힌트를 준 것이 또한 바로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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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글에서 언급한 나의 몇 안되는 여가활동 중 하나인) 영화보기는 '재미있는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라는 내 나름의 기준으로 분류되고 쌓여가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다양한 개취 분류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예컨데, 예의바른 영화 VS 불친절한 영화, 뻔한 재료 훌륭한 영화 VS 좋은 재료 망친 영화, 배우만 보이는 영화 VS 캐릭터만 보이는 영화 등 한 영화라도 다양한 해시태그(#)를 붙이다보면 그 영화는 나름의 카테고리 속에 자리 잡게 되는 식이었다.
이런 식의 '내멋대로 영화 뜯어보기'를 이어가던 어느날, 유사한 분류 속에 몇몇 같은 감독의 영화들이 서로 다른 해시태그를 달고 모여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나는 "아! 내가 이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는구나"를 알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그 감독의 영화를 찾아보면서 감독의 영화적 화법과 의도(메시지), 연출의 완성도 등의 구성 요소들에서 일관된 표현 방식들을 엿볼 수 있었다.
영화는 단순히 이야기를 담고있는 영상물 그 이상이다. 그 안에는 관객을 이해시키고 때론 설득시키기 위한 많은 커뮤니케이션 전략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플롯(Plot)'이란 개념이다.
영화에서 '플롯(Plot)'이란 특정 사건들을 선택하여 시간 속에 직조해 넣는 일,
혹은 그러한 행동의 결과로 만들어진 사건의 흐름을 말한다.
어떤 사건을 포함하고 어떤 사건을 배제할 것인가? 그리고 어떤 사건을 어떤 사건 다음에 배치할 것인가? 이 선택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플롯이다.
다크나이트(2008), 인셉션(2010), 인터스텔라(2014) 등으로 유명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플롯의 마술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영화의 스토리는 그만의 악보위에서 자유로운 변주(變奏) 를 만들어낸다. 그의 영화 <미행, Following>과 <메멘토, Memento>는 플롯을 이용하여 극적인 스토리 전개와 반전을 아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겠다. 개별된 사건들이 '그리고'로 이어진 스토리와는 달리 플롯은 '왜냐하면'이란 시각으로 자유롭게 재구성 할 수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데뷔작인 영화 '미행'은 흑백으로 제작된 70분짜리 짧은 저예산 영화다. 직업도 없는 작가 지망생인 주인공 '빌'은 심심풀이로 사람들의 뒤를 따라가보다가 의도치 않게 범죄에 휘말리게 되는데 영화의 초중반까지는 에피소드를 나열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다가 후반부에서 각 에피소드들의 '시간을 섞어 재구성'하면서 극적인 결론으로 이어지게 한다.
우리는 영화 '미행'이 감독의 다음 영화인 '메멘토'와 닮아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메멘토'는 아내가 살해된 후 단 10분밖에 기억을 못하는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 '레너드'가 사진과 메모에 의존해 사건을 쫓는 추적 스릴러 영화다. 감독은 '미행'에서 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플롯을 이용하여 드라마틱한 대반전을 보여준다. 과거와 현재를 흑백과 컬러로 구분하고 사건의 기록과 시간을 재구성하여 보여주는데, 마치 영화를 보는 관객이 '레너드'가 되어 함께 범이을 쫓는 기분이 들 정도로 영화에 몰입하게 한다.
영화에서 관객으로 하여금 공감을 불러 일으킴과 동시에 이야기의 맥락을 설득시키는 또다른 방법은 바로 상황 연출이다. 관객에게 인지되는 ‘영화적 상황’은 쇼트(Shot)와 씬(Scene)으로 구성된 시퀀스(Sequence)에 의해 만들어진다. 영는 움직이는 연속된 화면. 즉 영상으로 전달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 공간에서 감독은 자신의 의도에 따라 같은 상황의 시퀀스라도 그것을 아름답게도, 사실적으로도 때로는 폭력적으로도 연출할 수 있다. 물론 영화의 전개 상 어떤 비중을 부여하고 어떤 표현 방식을 취할 것인지 가장 적합하고 창의적인 방법을 결정해야 할 것이다.
1999년 12월에 개봉한 정지우 감독의 영화 <해피엔드>는 은행을 다니다가 실직한 서민기(최민식 분)와 성공한 커리어우먼인 그의 아내 최보라(전도연 분) 사이의 애정과 집착, 살의를 그린 스릴러 영화다. 최보라는 우연히 대학시절 연인이었던 김일범(주진모 분)을 만나 밀애를 나누고, 그 사실을 알게된 서민기는 배반감과 상실감에 괴로워하면서도 내색하지 않은채 고통의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그의 고통은 집착으로 변하고 급기야 아내를 무참히 살해하고 완전 범죄를 꿈꾸게 된다.
최민식, 전도연의 완벽한 연기력은 단연 영화의 완성도를 높였을 뿐만 아니라 영화 내내 스며있는 암시와 복선은 영화를 보는 또다른 관전 포인트이다. 하지만 필자가 이 글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연출을 통해 관객 설득'을 시도했던 부분은 바로 영화의 도입부이다.
최보라와 김일범이 재회하여 애틋함을 느끼며 아직 서로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면서 둘은 김일범의 오피스텔에서 사랑을 나누게 된다. 감독은 이 베드신을 지나칠정도로 적나라하게(?) 연출했다. 그것은 당시 한국영화에서 충분히 파격적이라고 평하는 것에 조금의 망설임이 없을 것이다. 뿐만아니라 최보라는 영화 중반 김일범을 만나기 위해 폐륜적인 행동을 서슴치 않는다. 관객은 성공한 커리어우먼 최보라의 외도와 김일범과의 격정적인 알몸 베드신을 보면서 그리고 김일범을 만나기 위해 겨우 5개월 딸에게 저지른 폐륜적 행동을 보면서 참을수 없는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이와 동시에 그 사실을 모른채 딸을 돌보며 일상을 보내고, 후에 아내의 불륜을 눈치 채고도 내색하지 못하며 고동스러워 하는 서민기에게 격한 동정심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서민기는 아내에게 그 고통과 분노를 퍼붓듯 무참히 살해한다. 최보라와 김일범의 베드신 만큼이나 지나칠 정도로.
영화는 평범한 가장 서민기의 천인공노 할 살인. 그것도 자신의 아내를 그토록 무참히 살해한것에 대해 마치 서민기의 입장에서 증거를 제시하는 듯 하다. 만약 최보라의 불륜을 그렇게까지 과감하고 도발적인 섹스로 그려내지 않았다면, 그녀를 가정과 아이마저 내팽개친 폐륜모의 모습으로 담아내지 않았다면, 관객은 어쩌면 서민기를 광기어린 미치광이 살인마로 인식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관객은 어느 순간 서민기가 아내를 살해하는 장면에서 어쩌면 잠시나마 "최보라, 아니 저년 저렇게 될 줄 알았지"라며 인과응보적 심판을 떠올리는 경험을 했을수도 있다. 또한 어쩌면 최민식의 분노에 찬 표정에서 서민기의 고통과 비통함을 느끼고, 그의 살인 동기에 통감하는 이율배반적인 인지 부조화를 느꼈으리라. 필자는 관객에게 그러한 공감과 몰입을 경험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영화가 연출을 통해 의도와 질문을 전달하고 공감, 이해, 설득을 유도하는 고도의 설득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앞에서 설명했던 이러한 영화적 커뮤니케이션 요소들이 내가 일하고 있는 현장에서의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상황. 즉, 전달자가 생각하는 개념들을 상대방에게 이해시키고 받아들이게 하는 장치들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좀더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정보, 연구결과, 컨셉, 인사이트 등)를 하나의 시나리오 또는 스토리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라고 가정했을 때 나의 동료나 상사는 내 영화(보고서)의 관객이 되는 것이고, 그 영화는 결국 그들에 의해 평가 받게 된다. 상업영화의 그것 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