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 유산은 범죄율을 낮췄을까요?
미국의 범죄율 그래프를 찾아보면 1990년대부터 급격히 하락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한데, 그중 하나가 인공유산이 합법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에 대해서 동의하시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관이나 가치관에 따라 인공유산이라는 주제 자체에 대해서 논의하길 원치 않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만약 너무 불편하시다면 다른 글을 읽어주셔도 좋습니다.
인공 유산의 합법화가 미국의 범죄율 하락에 기여했다는 설명은 스탠퍼드 대학교의 존 도너휴, 시카고 대학교의 스티븐 레빗이 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미국 각 주의 인공 유산 합법화 시점과 범죄율 하락의 그래프를 분석하여, 해당 지역에서 인공 유산이 가능해진 시점으로부터 약 20년 뒤에 해당 지역의 범죄율이 하락했음을 확인했습니다.
이럴 때 의사들이 귀에 못이 박히게 듣는 말이 선후 관계와 인과 관계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공 유산이 합법화된 20년 후에 범죄율이 하락했다고 설명할 수도 있지만, 감자 수입량이 통제된 이후 20년 후에 범죄율이 하락했다고 설명할 수도 있으니까요. 만약 앞에 일어난 일이 후에 일어난 일의 원인이라면 범죄율이 하락하기 20년 전에 일어난 모든 사건들이 범죄율 하락에 기여했다고 봐야 하는데 그게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너휴와 레빗의 설명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계획하지 않았고, 원치 않는 임신의 결과로 태어난 원치 않는 아이, 그 아이를 보는 엄마의 시선은 어떨지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물론 모두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어떤 엄마는 기대하지 않았던 아이가 태어난 이후 새로운 생명에 대한 경외와 양육의 행복을 느끼며 출산을 세상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만약 어떤 이유로든 나에게 선택권이 있었다면 이 아이를 낳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엄마라면 어떨까요.
인간 아기는 기본적으로 매우 취약합니다. 큰 머리가 엄마의 골반을 통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이었다고 합니다. 더 성숙해서 출산을 한다면 출산 과정 중 사망할 위험이 너무 커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라는 종은 매우 미숙한 태아를 일단 세상에 내놓은 뒤 부모, 조부모, 가끔은 이웃까지 힘을 합쳐 생존 가능한 시점까지 돌보는 전략을 취합니다.
그래서 인간 아이는 양육자에 대한 의존이 매우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양육자가 없으면 생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취약한 시기에는 옆에 있는 누구에게라도 의존하게끔 하는 메커니즘이 개발됐습니다. 그것 중 하나가 바로 스트레스 저반응이라는 것입니다. 그 명칭이야 어찌 되었든 이 시기에는 이른바 스트레스 호르몬이라고 하는 코티솔이 거의 분비되지 않습니다.
코티솔이 분비되면 인간의 몸은 지금 스트레스 상황이라고 느끼며 회피하거나 투쟁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차단된다는 것은 이 시기에는 그 어떤 자극이 있어도 그저 받아들이고 수용하고, 무조건적으로 애착을 형성하겠다는 뜻입니다.
이 과정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어린 시절 학대를 받고 자란 사람이 성인이 된 이후 자신에게 함부로 하는 연인이나 배우자와 관계를 유지하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스트레스 저반응 시기에 이들이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인 애착의 방식은 그들을 함부로 대하고, 방치하고, 폄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원판은 그들의 마음속에 깊이 남았고 그들에게는 학대와 방임이 사랑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지요.
또한 아이들이 양육자로부터 생존과 관련된 자원을 공급받을 것이라는 확정 짓기 위해 온갖 전략들이 개발됐습니다. 그중 하나가 사회적 미소를 지으며 애교를 부려 양육자가 자신에게 돌려주는 온화한 미소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더 철이 들면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 엄마는 나를 낳아서 행복할까?”
스트레스 저반응을 시기에 부적절한 애착이 형성된 이후 유년기, 청년기를 맞이한 아이들은 여전히 엄마를 사랑하고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우리 엄마가 여느 엄마와는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될지도 모릅니다. 따뜻하게 안아주지도 않고, 온화한 눈빛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도 않고, 들뜬 목소리로 칭찬을 해주지도 않습니다. 나를 보면 화를 내고, 어떤 때는 “너 때문에 내 인생이 이 모양이 되었다”며 내 존재 자체를 후회하기도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 자신의 역할을 하고, 사랑받고 사랑하면서 살기가 그리 쉬울까요? 나를 낳은 엄마에게서도 거부당했는데 말입니다.
인공 유산을 옹호하고자 쓰는 글은 절대 아닙니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린아이에게 엄마라는 존재가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크고, 깊고, 긴지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유가 번식을 위해서는 아닙니다. 인간도 동물이라고는 하지만 우리는 그보다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하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유가 국가에 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국가를 위해서 개인이 희생할 이유는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해 볼 수 있는 가장 고귀한 가치 중 하나가 사랑임에 대해서 부정하기 어려우며, 그중 가장 순수한 형태의 사랑이 부모가 자녀에게 보이는 사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