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내리다, 잡다, 허락하다.
이 일을 시작한지 40년, 내 가게를 연지는 32년. 가게를 닫을 때가 다가온 요즘 그간 이곳을 다녀갔던 여러 손님들이 떠오른다. 마치 주마등이라는 것이 지나가듯 조금씩, 아주 예전의 기억도. 오늘 떠오른 손님은 눈이 천천히 내리던 날, 가로등 주황빛이 눈을 물들이던 저녁에 만났다.
그는 길고 무거워 보이는 코트 차림에 고요한 느낌을 주었다. 단정하게 검은 우산을 접어 우산꽂이에 조심히 두고 난로에 손을 녹였다. 손이 얼었는지 열심히 손을 움직이며 자신의 손을 바라보던 것이 기억에 난다. 손을 녹인 그는 물건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여느 때처럼 나는 계산대 뒤 푹신한 의자에 앉아 덮어두었던 책을 계속 읽었다. 손님에게 충분히 시간을 주는 것이 서로에게 편했기 때문에 개업 3년 이후부터는 그래왔다. 이곳에서 만큼은 자신의 선택에 초조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래도 손님에게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지 조금씩 살펴보는데 이 손님은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고민하는 표정이 물색했다.
나는 도움을 주기 위해 선물하느냐고 물었고, 그는 애인에게 선물하려는데 잘 맞는 것을 주고 싶다며 답을 해왔다. 그가 살펴본 것들은 장식이 많이 없지만 착용감과 재질이 좋은 장갑들이었다. 젊어 보이는 손님, 비슷한 나이대의 애인을 생각하며 당시에 유행했던 손모아 장갑을 반대편에서 가져와 추천했다. 그는 머뭇거리며 내가 내민 장갑을 보더니 할 말을 그제야 정한 듯 자신의 애인은 손가락이 예뻐서 손가락이 잘 보이는 장갑을 선물하고 싶다고 했다. 곱씹어 내며 천천히 말을 하는 그의 굳어있던 얼굴에는, 저무는 햇살이 살짝 일렁인 물결에 반사되듯 미소가 스몄다.
한 번 말을 걸자 그는 고민 했던 것을 쏟아내듯 질문을 해왔다. 어떤 것이 가장 속 재질이 좋은 건지, 이 장갑은 손가락 움직이는 게 둔할지, 오래 가는 소재는 무엇인지. 장갑 하나에 이렇게나 따져가며 사는 사람이 처음인지라 흥미로웠다. 그렇게 답을 듣고, 고민을 하고, 장갑을 껴보고 하던 그는 내게 장갑 하나를 가지고 망설이는 표정으로 찾아왔다. 이게 가장 마음에 들었냐는 말에 또 마음속에 할 말을 정하는 듯 그는 침묵 하다가 내게 물었다. 이게 디자인도 좋고 활동성도 좋은데, 속 재질이 더 부드럽고 손을 잘 보호했으면 좋겠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꼼꼼히 따지는 사람 치고 태도는 민망한 듯 서걱 거리는 샤베트를 닮았다.
그러다가 그는 계산대 앞에 붙은 안내서를 봤다. 장갑 주문 제작에 관련된 안내서였다. 물론 가게에 있는 장갑의 일부는 받아오는 것이지만 나머지는 내가 만든 장갑이었다. 그러니 필요하다면 주문 제작도 가능하다는 점이 내 가게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또한 그것을 알고 멀리서 찾아오는 손님도 있을 정도였다. 물론 가격이 조금 더 오르기 때문에 손님들이 언급하기 전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는 안내서를 보더니 그러면 이 장갑에 속 재질만 더 부드러운 것으로 주문 제작 할 수 있는 거냐고 상체가 튀어나올 듯 물어왔다. 주문 제작이 누구보다 필요했던 것 같은데 퍽 운도 좋구나. 우리 가게에 아무 것도 모르고 찾아오다니. 누군가를 향한 깊은 마음에는 곧잘 행운이 깃들곤 한다.
잠깐이지만 그와 이야기를 하며 그의 애인의 손을 그가 얼마나 아끼는지 알게 됐다. 그는 애인이 아직 전쟁터 같은 세상에서 손을 무기로 이겨내는, 그리고 지켜내는 사람이라고 했다. 머릿속 가득, 아니 머리를 채우고도 목 어깨 명치 모두 그 애인이란 작자가 들어찬 듯 반짝이는 눈으로 말이다. 대체 그게 뭐 하는 사람이람. 피아니스트인가. 공예가인가. 간호사인가. 굳이 저렇게 표현하는데 직접적인 직업을 묻기는 뭐 했다. 길고 긴 생에 궁금한 것 몇 개는 남겨둬도 괜찮으니까.
며칠 뒤, 그가 장갑을 찾으러 왔을 때 완성된 장갑을 확인하던 그의 얼굴에 또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에 선물 받을 사람의 기쁨이 미리 보일 정도였다. 액수에 딱 맞게 챙겨온 현금마저 그 같았다. 이 장갑이 지켜내는 건 그 애인의 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 장갑은 아무래도 지금 내 눈 앞에 서있는 사람의 행복 따위를 지키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몇 해가 지나 다시 겨울이 왔다. 들어온 세 사람. 앞서서 들어온 한 사람의 손에는 내가 만든 장갑이 씌워져 있었다. 전쟁터, 무기, 손. 저 손이 그 손이라는 느낌을 밀려오듯 받았다. 그는 내게 인사를 한 뒤, 뒤따라 온 두 사람과 오래도록 장갑을 골랐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서로의 취향이 아닌 것 같은 장갑을 장난으로 추천해주는 것 같기도 하고. 물론 나는 그들이 내 장갑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는 모른다. 그저 그때처럼 천천히 내리는 눈틈에 물결처럼 손가락이 움직였을 뿐이다.
그는 수어로 두 사람의 말을 내게 통역해주며, 또 내 말을 그들에게 손으로 전해주며 장갑을 주문 제작 했다. 몇 해 전 당신에게 그 장갑을 선물한 사람과는 잘 지내는지. 그 장갑이 내가 만든 것임을 알고 온 건지. 당신이 마주하는 그 세계에서 여전히 지키고픈 것들을 지키며 이겨내고 있는지. 수많은 질문이 생겼지만 역시나 하지 못했다. 그저 그때처럼 나의 장갑이 그들의 무기를, 그리고 그 미소를 잘 지켰으면 하는 마음으로 인사를 건넸을 뿐이다. 그 무렵 나는 인간들이 말하는 사랑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