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Tout s'est bien passé>
* 부족한 프랑스어로 자막 없이 보아서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 채 쓰는 (기록용 목적) 후기.
중간에 인용한 카이에 뒤 시네마 해석 오역 주의.
어느 날 에마뉘엘은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고 급하게 병원으로 향한다. 반신이 마비가 된 아버지는 홀로 식사를 할 수도, 용변을 볼 수도 없다. 그런 그는 자신의 딸에게 안락사를 부탁한다.
사람은 모두 죽는다. 이 당연한 사실을 우리는 늘 잊고 지낸다. 그래서 죽음은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다. 그래서 그것이 가장 가까이 다가왔을 때 우리는 그 사실이 주는 공포와 상실감에 짓눌리고 만다. 이 영화의 소재는 충분히 자극적이고 신파적으로 그릴 수 있었다. 안락사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인간의 존엄성을 떠올리기 때문에 그것이 무너지는 아버지와 그 모습을 지켜보는 딸의 모습들을 보여주며 관객들에게 쉽고 간편하게 어필할 수도 있다. 당장 나만 하더라도 "딸에게 죽음을 부탁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고 무서워 눈물이 날 것 같으니까.
카이에 뒤 시네마 9월호에 쓰인 <Tout s'est passé> 관련 기사를 보면, 평론가 Marcos Uzal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장면 연출들은 우리가 영화의 소재가 표출할 수 있는 감정에 감정에 짓눌리지 않게끔 한다고 말했다. 또한 변호사를 찾아가는 등 부르주아적인 신중한 태도나 아버지의 농담으로 보여 주는 유머러스한 코드가 이 소재의 심각성을 덜어준다고 덧붙였다. 맞다. 프랑수와 오종 감독은 죽음을 마냥 무겁게만 다루지 않는다. 영화는 120분 동안 굉장히 일상적인 톤으로 인물들을 다룬다. 우리는 분명 아버지의 죽음 앞에 슬퍼야 하지만, 일상의 나열과 중간중간의 유머 코드들을 통해 무거운 죽음이라는 존재는 어느덧 꽤나 가벼워졌음을 느낀다. 물론 그렇다고 마냥 유쾌하지는 않은데, 감독은 희비를 적절히 섞으며 영화 마지막 에마뉘엘이 느끼는 감정에 관객들이 도달할 수 있게끔 도와준다. 아버지의 죽음을 생각하면 너무 슬프지만, 그것을 준비하는 과정은 어느덧 일상 속에 섞여 버렸다. 슬픈데 슬프지 않고, 괜찮은데 괜찮지 않다. 에마뉘엘의 일상을 따라온 관객들은 문이 닫히는 엠뷸런스를 보며, 모든 것이 잘 끝났다는 안락사 회사 직원의 전화를 들으며, 결국 이 오묘한 감정에 동화되었다.
이 영화를 그래서 만족스럽게 보았느냐. 나는 위 평론가가 말한 것처럼 죽음을 너무 심각하게 다루지 않고 그 과정을 일상의 파편들로 보여주는 연출은 좋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화 러닝타임은 2시간에 가까운, 113분이다. 영화 러닝타임이 줄고 줄어 한 90분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내 기준, 약간 늘어진다는 느낌을 받았고 필요 없어 보이는 장면들이 종종 보였다. 약간 드라마를 보는 느낌이 들었는데, 아무래도 영화 에마뉘엘이 있는 공간에 대한 당위성을 찾지 못해서인 것 같다. 장면을 위한 공간보다는 공간을 위한 장면 같아서 약간... 재벌들이 돈가스 집에서 생일 파티하고, 백날 천날 서브웨이 먹는 드라마 주인공들 보는 느낌. (근데 뭐 이건 내가... 영화를 다 이해 못 해서 그런 것일 수도.. 훗날 다 이해하게 되면 수정할 수도 있음.)
그래도 솔직히 고백하자면, 마지막 장면 앰뷸런스 장면에서 조금 울컥하긴 했다. 가족의 죽음은 참 생각만 해도 가슴 아프다. 그런데 거기에 자신의 죽음을 부탁한 아빠라니. 참 영화 속 에마뉘엘 말처럼 나쁜 아빠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하는 딸. 에마뉘엘의 엄마가 말한다. 그런데 그를 좋아했다고, 그래서 그를 떠나지 않았다고. 가족은 사실 서로에게 못된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그들을 미워할 수는 없다. 슬픈데, 화나는데, 결국에는 사랑하는 어쩌면 우리의 가장 일상적인 모습.
다 잘 되었다.
아버지의 죽음도.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남아 있는 사람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