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이별, 그리고 죽음.

by 책읽는땃쥐

이별은 죽음과 다르지 않다.

'페스트'를 통해 이별을 겪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아픔, 이별의 본질에 대해 알아보고, 이별과 죽음의 등가성에 대해 말해보고 싶다.

페스트가 발병한 오랑시는 갑작스러운 폐쇄조치를 감수하게 된다. 의사 리유와 파리에서 온 기자 랑베르는 사랑하는 이와의 생이별을 겪게 된다.

물론 이 둘만 이별을 겪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도시에 격리된 모두가 똑같은 고통을 겪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고통이란, 이별이란 질병에서 비롯된 증상이며 진행경과는 다음과 같았다.

먼저 그들은 모두 이별한 존재와의 기억을 더듬는다. 마치 바로 옆에 존재하는 것처럼, 환상에 실체를 부여하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그들은 곧 실패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랑하는 존재를 완벽히 재현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저 추억을 몇 번이고 돌이켜 보게 된다. 그때는, 그때 만약, 같은 식의 후회를 반복한다. 물론 돌이킬 수 있는 일은 없다. 시간이 지나며 그들은 점점 비참해진다.

닳아버린 기억은 단물이 다 빠져 떫은 씁쓸함 만을 남긴다. 그렇게 점점 사랑하는 존재를 떠올리길 포기하게 된다.

'이와 같이 아무 소용도 없는 기억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모든 죄수들과 모든 유형수들의 깊은 고통을 그들은 맛보고 있었다. 그들이 끊임없이 되씹곤 하는 그 과거조차도, 후회의 쓴 맛밖에는 남은 것이 없었다.' -페스트 100p-

리유의 부인은 시 밖에서 요양중이었고, 랑베르의 연인은 파리에서 랑베르를 기다리고 있었다. 둘은 페스트가 금방 사라질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할 수도, 믿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둘은 각자의 방법으로 사랑하는 이를 만나기 위한 노력을 한다. 리유는 타루와 함께 자치조직을 만들어 페스트 환자들의 치료와 격리를 도왔고, 랑베르는 시 밖을 빠져나갈 궁리를 했다.

페스트가 처음 이 도시에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페스트가 도시를 붕괴시켰을 때, 사람들은 이 조치가 길게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페스트가 그들의 목에 죽음이라는 개념을 들이밀자 그제서야 사람들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유형수로서의 삶을 받아들였다.

죽음이 본질적으로 영원한 이별을 수반한다는 걸 그 누가 부정하겠는가? 즉 죽음은 이별임이 자명하다. 따라서 죽음은 남겨진 이들에게 상술한 이별의 고통을 남긴다. 죽음이 남긴 상처도, 흉터도 모두 남겨진 자의 몫이 된다.

페스트가 극심해지기 직전의 사람들은 모두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페스트가 극심해진 오랑시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기 전에, 생각해 보고 싶은 주제가 있다.

그건 바로 이별의 상태에서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이 느끼는 고독에 대해서다.

이별을 겪은 이들은 그들이 사랑했던 존재로부터 유리된다. 이별의 순간 전까지 서로 공유하며, 서로를 행복하게 했던 기억들. 그것들은 이별의 순간을 지나면, 마치 자가면역질환처럼 스스로를 공격한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함께 만든 세계에서 추방된 개인은 이방인이 된 채 고독으로 고통 받는다. 그리고 바로 이 상태에서, 가련한 이방인들이 고독을 극복하기 위해 보이는 공통된 반응은 바로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이야기를 들어주길 원하고, 공감을 갈구하는 것이다. 현재의 고통을 지우고, 다시 세계에 속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페스트'는 말하고 있다.

'만약 우리들 중 누가 우연히 자기 내심을 털어놓거나 모종의 감정을 말해도, 그 사람이 받을 수 있는 대답은 어떤 종류건 간에 대개는 마음을 아프게 하는 대답이었다. (중략) 사실 그는 오래 두고 마음속에서만 되씹으며 괴로워한 끝에 그 심정을 표현한 것이었으며, 그가 상대방에게 전달하고자 한 이미지는 기대와 정열의 불 속에서 오래 익힌 것이었다. 그와 반대로 상대방은 습관적인 감동이나 시장에 가면 살 수 있을 상투적인 괴로움이나, 판에 박힌 감상정도로 상상하는 것이다. (중략) 그 경우에도 가장 절실한 슬픔이 흔해 빠진 대화의 상투적 표현으로 변해 버리기 일쑤였다.' -페스트 104p-

다시 원래의 주제로 돌아가 이별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 아마 각자 쉬운 대답을 갖고 있을 것이며, 그것은 정답일 것이다. 그렇다. 이별은 멀어지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지는 것이며, 마음이 멀리 떠나가는 것이다. 이 두 이별은 어느 하나가 일어나면, 다른 하나도 일어나곤 한다. 그리고 이별은 어떠한 관계에서도 반드시 발생하고야 만다.

페스트가 극심해진 오랑시에서 사람들은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의사 리유와 자치조직의 행정을 맡던 타루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서서히 죽음에, 이별에, 페스트에 무감각해져 갔다. 손씻기를 게을리할 때가 생겼고, 마스크를 철저히 쓰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리고 페스트는 절대 이런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페스트는 리유와 진실된 우정을 나누고 있던 타루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불행은 겹쳐, 리유는 아내가 요양중 사망했다는 전보를 받는다.

리유는 이 절망적인 상황에, 부조리에 쓰러질 듯 하면서도 간신히 그의 일을 계속했다. 리유가 간신히 버티는 사이에 페스트는 등장한 것 만큼이나 갑작스럽게 사라져갔다. 타루와 함께 페스트는 오랑시에서 사라졌다.

페스트가 끝난 후 랑베르는 사랑하던 인연을 다시 만났다. 도시에는 너무 많은 이별, 죽음, 그리고 부조리가 잔재했지만 사람들은 그럼에도 사라진 페스트와 도시의 개방에 기뻐했다.

페스트가 사라진 후 남겨진 리유를 통해 이별과 죽음의 등가성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리유가 보인 인간의 노력, 공감을 통해 진리의 길에 닿는 저항은 이 글에서 다루지 않기로 했다.

리유는 아내와 떨어져 있는 동안 이별의 고통을 겪었음이 분명하다. 또, 타루가 죽은 후 역시 리유는 이별의 고통을 겪었다. 그런데, 아내가 죽은 후 리유는 이별의 고통을 겪었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리유가 겪은 두 번의 이별은 서로 다른 이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첫번째 이별을 겪기 전과 후, 리유와 아내 사이의 관계 역시 다름을 말하고자 한다.

한 번 이별의 고통을 경험한 순간 이별을 경험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이별은 비가역적이다. 따라서 리유는 아내와 생이별을 겪은 후, 아내와 새로운 관계를 형성했다. 그리고, 아내가 죽었을 때 리유는 이 새로운 관계의 파괴로 말미암아 이별의 고통을 겪은 것이다.

혹자는 랑베르를 예로 들며 이별은 가역적이라 말할 것이다. 이별을 겪은 후 연인을 다시 만나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랑베르의 저 눈물은 틀림없이 기존의 관계가 회복되어 흘리는 눈물이라고 말이다.

그렇지 않다. 이별한 존재가 겪는 고독을 기억해야 한다. 랑베르가 흘리는 눈물은 이미 사라진 관계대신, 새로이 형성된 관계로부터 비롯된 눈물이다. 랑베르가 그리워했던 사랑은 이별을 겪은 순간 이미 사라지고 만 것이다. 지금 랑베르가 갖고 있는 사랑은 이별을 겪기 전의 것과 완전히 다른 성질의 것이다.

즉 이별은 비가역적이기에, 나는 이별이 죽음과 같다고 주장한다. 삶의 최후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듯이, 관계의 끝에는 항상 이별이 기다리고 있다.

따라서 모든 삶이 최후의 부조리를 겪듯이, 모든 관계 역시 그러하다. 모든 관계는 부조리한 결말을 맞이하고 만다.

삶이 그러하듯, 이별을 기다리는 모든 관계가 가치 있길 바라기에, 이 부조리한 논증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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