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병원진료를 하면서 문득 치료관계란 참 외로운 관계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생각이 들게 된 계기는. 내가 soothing box (자기진정박스) list 를 작성하게 되면서 삐약쌤에게 한번 부탁을 드려야겠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내 리스트에는 삐약쌤이 메모지에 적어주신 말 이라고 쓰여 있는데.. 나는 삐약쌤이 내게 힘든 순간에 보고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을 만한 메세지를 하나 써서 주셨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있었다.
나는 평소 치료자들과의 연결감을 느끼는 것이 매우 필요하여, 삐약쌤이 12월부터 내게 병원 톡채널을 통해 혼잣말을 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해주셨고. 그 전에는 상담선생님께 이메일을 하루에 5~10통 정도를 2년 넘게 매일같이 보내기도 했다. 어느 순간 상담선생님이 이제 우리 이메일은 그만 하자고 통보했고. 이후 힘들어하는 나를 보며 삐약쌤이 톡채널에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것이다.
나는 치료자들과 치료세팅에서의 만남은 늘 즐겁고 좋지만, 잠시라도 그들과 떨어져 있을 때에는 그들과 마음이 연결되어 있지 않고 단절되어 버리는 느낌이 든다. 이럴 때 나는 공허함과 외로움에 빠진다. 치료자들의 마음을 일상 속에서도 계속 느끼고 그들과의 연결감으로 안정되기 위해서 나는 상담에서는 녹음을 활용해서 힘든 순간에 상담선생님의 목소리가 담긴 녹음파일을 반복해서 듣는 편이다. 삐약쌤의 경우, 전에 선생님이 해주신 메모에 의미부여를 하여서 그 물건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며 그렇게라도 연결감을 느끼려고 애쓴다. 특히 메모 같은 경우는, 그냥 선생님이 진료 중에 이것들을 좀 해보세요! 하고 간단히 적어주신 것이고 특별한 감정이 담겨있거나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 메모를 책상위에 붙여두고 ‘아.. 우리 선생님 손글씨..ㅎㅎ 아 이 메모는 선생님이 적어주신것!’ 이라고 생각하며 감정이입을 하고 그 메모지에 집착을 하게 됐다.
이번 soothing box list도 다르지 않았다. 리스트엔 상담녹음파일이 적혀 있기도 하고, 삐약쌤이 주신 메모도 있는데. 사실 삐약쌤이 거절하실까 두려워서 몇주째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진료에서 드디어 이야기를 꺼내 본 것이다. 삐약쌤은, 그 내용을 내가 톡으로 보낸걸 알고 계신지, "아 그 내용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음.. 고민을 해봐야해요. 사실 90%의 제 마음은 거절한다 인데. 왜냐하면, ㅇㅇㅇ님이 물론 저에게 특별한 환자분이고. 하지만 특별하다 해서 이런것까지 해준다? 라는 것은 이 관계를 넘어서는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해서요. 저는 저를 위해서, 저를 생각해서 거절하겠습니다!" 라고 말하시는게 아닌가.
솔직히 조금 당황하고 실망스럽기도 했다. 그깟 메모지 메세지가 뭐라고. 우리 관계는 그 메세지 하나 써 줄 수도 없는 관계라는 말인가??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삐약쌤은 내게 "저를 위해서/ 저를 생각해서" 거절하겠다. 라고 말한 부분도 솔직히 많이 서운했다. 그리고 예전에 삐약쌤이 내게 해주셨던 말이 생각났다. 내가 정신건강 분야에서 치료자로 일하는거 굉장히 보람있고 좋아보인다.. 나도 능력만 되면 하고싶기도 하다 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삐약쌤은 대답했다. "음.. 치료자라는 위치가.. 사실 참 많이 외로워요. 이 직업은 많이 외로운 직업이에요" 그 순간 외롭다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라 궁금했다. 삐약쌤은 이어서 말했다. "뭐 친구관계라면, 하고싶은말 다 꺼내서 하고 욕도 같이 하고 제 생각을 자유롭게 말할수있는데.. 환자분을 대할때는.. 최대한 저의 입장에서의 의견같은 것은 빼고 환자분을 위한 꼭 필요한 말만을 해야하니까.. 제가 막 저의 의견이나 생각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서요"
최근 진료에서 이 말이 생각났던 것은, 치료자란 자신의 정신이나 신체건강 상태를 최상으로 끌어올려 유지해야만 환자나 내담자를 치료할 수 있고. 또 안정적인 치료관계를 유지해나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뒤로 물러서서 객관적인 입장을 취해야하며, 개인사적인 의견이나 생각을 환자에게 주입해서도 안되고, 다른 환자들을 생각해서, 한 환자에게만 특별한 무언가를 줘서도 안된다는 것. 항상 일정한 거리를 둔 채, 환자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 치료자 입장에서는 굉장히 외로울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치료자만 외롭나? 환자인 나도 외롭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내가 치료자를 좋아하고 가까이 다가가려 애써도, 우리의 관계는 38선처럼 명백한 선이 그어져 있는 관계. 그 선을 넘어가면 우리의 치료관계는 종료될지도 모르는 상황.
이번 진료에서 나는 또 말했다. ”치료자들이 저에게 거리를 두기 때문에 이 관계가 유지가 되는거겠죠?“ 선생님은 그럼요, 하고 말했다. 뒤이어 나는 ”씁쓸하네요..“ 하고 말했는데 삐약쌤이 공감간다는 표정을 지으며 ”알죠 무슨뜻인지 알아요..“ 하고 말했다.
치료관계란 참 외로운 관계같다. 치료자에게도, 환자에게도. 하지만 나는 이 관계가 같은 방향의 목적성이 있는 관계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치료동맹 이라는 단어가 있지 않은가. 맞다, 우리의 관계는 작은 메모지 한 장 써서 건네주기도 어려운 관계이지만 어쩌면 더 큰 목표를 향해서 달리는 관계가 아닐까. 그 목표를 위해서 함께 이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치료자는 자신을 생각해야 하며,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해야한다. 그래서 외롭지만 또 함께 갈 수 있는 관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 내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
치료관계라는게, 잘 모르는 남들이 보기에 그저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해받고 공감받으며 마냥 따뜻하고 좋을 것이라고만 생각하는데. 사실 그 안에 들어와 보면 생각보다 굉장히 외로운 관계다. 우리 관계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일정 선을 넘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이, 치료관계에 대한 막연한 환상만을 가지고 치료를 시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