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살 꼬마의 소주심부름

<내가 죽거든 술독아래 묻어줘 술독이 셀지도 모르쟎아!>

by nAmsoNg


해가 뒷산의 등 뒤로 숨어버린 마을에 험상궂은 어둠이 찾아왔다.


개구리울음소리가 적막한 어둠에 심심한 위로가 되지만 혼자 걷는 7살 어린아이에게는 소용없는 일이었다.

손에 든 동전을 얼마나 다부지게 쥐었는지 땀으로 미끈거렸다. 듬성듬성 심어진 가로등이 떨어뜨리는 고깔 모양의 빛을 10개는 지나야 <돼지상회>불빛이 보였다. 집에서 나와 동네 가게로 가는 길은 몇 개의 가로등뿐이라 어두웠다. 걷는 내내 나는 남자라 이깟 어둠쯤은 전혀 무섭지 않다고 곱씹었지만 씹을수록 점점 무서워졌다. 뒤를 돌아보면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하얀 소복 속으로 발을 숨긴 여자가 나를 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땐 <전설의 고향>이라는 TV 프로가 있었는데 각 지방마다 전해 내려오는 한 맺힌 귀신들의 이야기였다. 보통은 일찍 자기 때문에 볼일이 없지만 종종 잠자리가 늦어질 때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보게 된 몇 장면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지금은 귀신보다 사람이 더 무서워서 그런지 어둠이 내린 시간에 7살 아이에게 심부름을 보내는 부모는 보지 못했다. 나 역시 7살인 아들에게는 아파트 정문에 있는 슈퍼에도 심부름을 보내지 않는다. 귀신보다 자동차가 무섭고 사람이 무섭다.

시대적 흐름이 그러했는지 강하게 키워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 때문이었는지 아버지는 저녁 반주를 위해 깜깜한 시골길로 나를 내몰았다. 400원을 주먹에 꼭 쥐고 공상 속의 하얀 옷을 입은 여자 앞에 앞장서서 소주를 구하러 간 것이다. 고작 7살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배달 서비스직에 취직이라도 한 듯이 부모님이 손에 쥐여주는 돈을 들고 심부름 다니기 시작했다. 저녁상을 차리는 엄마는 낮에 깜빡하고 사 오지 않는 두부나 콩나물을 주문했다. 내가 설명하기 어려운 것은 친절히 메모지에 적어주셨다. 돼지상회에 도착해서 메모지와 돈을 전달하고 뽀글뽀글한 머리에 돼지코를 닮은 아줌마가 주는 봉지를 들고 집으로 오는 간단한(?) 일이었다.

7살 아이는 아줌마가 돼지를 닮아서 가게 이름이 돼지상회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아버지가 사 오라는 것이 한국에 없으면 헤엄쳐서 미국에 가서라도 사 오는 거야!>

아버지의 심부름 철학이고 나는 보지도 못한 할아버지의 철학이다. 연천에서 400원짜리 소주 심부름을 할 때는 이 정도의 주문까진 하지 않으셨다.

부천에 살던 중학교 시절 차례를 지내고 아침식사 중이었다. 아버지는 명절 때마다 오는 2명의 삼촌과 반주를 하고 계셨다. 아니나 다를까 마지막 소주가 오바이트를 하며 몸을 비웠다.

<왜 항상 장 볼 때 소주를 넉넉히 사지 않으시는 것일까…> 아버지가 씨~익 웃으시며 나를 보셨다.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옷을 챙겨 입었다. 굳이 말은 필요 없었다.

<참나무통맑은소주다! 반드시 그 소주를 사 와야 한다.!> 아버지가 말씀하시지 않았지만 당연한 논리다.

분명 횡단보도 건너편 슈퍼에서 팔았는데 없었다. 조금 더 올라간 곳도 없었다. 그다음 슈퍼도 없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면 술 상에 흐름이 끊기니 다른 것을 사갈까? 아냐 저번에 그랬다가 혼났잖아?

미국에 가서라도 사 와야 하니 찾아보자> 속으로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재촉한 발걸음이 지하철 한 정거장의 거리만큼 움직였을 때야 원하는 소주를 살 수있었다. 사들고 오는 발걸음이 바빴고 나의 결정에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송내역까지 모든 슈퍼를 다 뒤지고 다녀왔으니 40분은 족히 넘었을 것이다. 집에 도착했을 때 어른들은 다른 소주를 따르며 술자리를 이어가고 있었다. 기다리지 못해 코앞의 슈퍼에서 다른 소주를 사오신 것이다. 아버지가 너의 한계는 거기까지라는 뉘앙스로 말씀하셨다

<야 임마! 유두리가 그렇게 없냐? 없으면 다른 거라도 사 와야 될 거 아니냐!?>

욕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숨이라도 잘못 쉬면 튀어나올 것 같았다.

<한국에 없으면 미국 가서라도 사 오라면서요!> 어금니를 꽉 다물고 속으로 말했다.

올라오는 화를 침으로 눌러 삼키며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딱딱해진 밥알이 혓바닥을 긁을 때마다 서러웠다.

<고생했어!>너도 좀 더 크면 마실 테니 이해하라는 듯 막내삼촌이 위로했다. 식상한 형식일 뿐이었다.

질풍노도의 중학생임에도 나는 학교에서 욕 한 번 하지 않고 생활했다. 그 시절 속으로라도 내가 욕을 한다는 것은 단지 욕에 담긴 화를 훨씬 넘어선 감정이었다.


시간이 흘러 삼촌들도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겼다. 군대를 다녀오는 동안 동생들은 내가 심부름을 다니던 나이까지 성장했다. 심부름 보낼 꼬마들이 있으니 이젠 명절 때 내가 술심부름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 싶었는데 세상이 변했다. 미성년자에게는 술을 팔지 않는 것이다. 억울함에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았다. 바닥에 주저앉아 두 다리로 투정 부리며 목놓아 외치고 싶었다.

<이제 나도 밥 먹다가 심부름 가기 싫다고요!!!! >


처음 내가 소주 심부름을 가던 나이만큼 우리 아들도 컸지만 아파트 앞의 슈퍼에도 심부름을 시키지 않는다.

아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도 되지만 어릴 적 내 기억이 나를 통제했다. 내가 그렇게도 싫어했던 잦은 심부름을 아들에게는 시키고 싶지 않았다. 냉장고에 씨앗이 된 소주를 꺼내오는 정도의 심부름이 전부이다.

네 다섯 걸음이면 닿는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오는 아들의 모습은 귀엽고 대견하다.

설마 아버지도 < 우리 아들이 이만큼 컸구나> 라는 흐뭇함으로 내게 소주 심부름을 시키셨을까?

그렇다 해도 너무 시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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