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피로 금주를 시키시겠다?

<나 죽거든 술독아래 묻어줘 술독이 셀지도 모르쟎아?! >

by nAmsoNg



나는 꽤나 보수적인 성격이다.

섹시한 여자보다는 단아한 여자를 좋아하며 밤늦게까지 친구들과 노는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꿈이 크지 않고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즐길 줄 아는 여자가 좋다. 사랑하는 남자의 의견에 순종적이며 내조가 사명임을 알고 있는 여자라면 결혼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이상형의 99%에 맞는 지금의 아내와 결혼했다.

연애를 하면 콩깍지가 씐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결혼하고 나니 이상형의 99%는 고사하고 1%도 맞는 부분이 없었다. 결혼을 물릴 수도 없고 답답할 노릇이었다. 유부남의 이상형은 < 처음 본 여자 >라는 말에 동감 할 때쯤 더 이상 아내의 속옷 바람에도 설레지 않는 중년이 되어있었다.


아내가 나의 이상형에 부합하는 한 가지를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 있다. 바로 밤늦게까지 친구들을 만나서 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연히 술도 마시지 못한다. 고맙게 생각하고 있지만 그로써 생기는 수많은 문제점 중 하나는 나의 음주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내를 처음만난날도 보라매공원을 걸으며 나는 맥주를 마셨다. 나는 술을 좋아하는 남자니 만나기 싫으면 만나지 말라는 메시지를 주려고 버젓이 눈앞에서 맥주캔을 들고 다니며 마셨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 단다. 내가 이렇게 술을 좋아할 줄은 몰랐다며 이제 와서 속았다고 한다. 누구를 탓하리오….


애주가의 동반자 자질이 0점인 아내는 내가 술을 마시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한다.

술을 좋아하긴 하지만 금주를 강요받을 행동을 하지 않으니 나는 언제나 억울할 뿐이다.

가정을 소홀히 하며 친구들과 만나서 술을 즐기지도 않는다. 친구도 일 년에 한번 만날까 말까 할 정도다. 당연히 술을 마시고 외박을 하는 일도 없다. 유일하게 밖에서 술을 마시는 것은 회사 회식 때뿐인데 그것도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회식 분위기는 술을 마시는 분위기가 아니라 식사로 반주 정도 하고 볼링을 치러가는 암울한 코스로 이어진다.

술을 마실 때마다 변기를 부여잡고 듣기 거북한 소리를 내며 먹은 것을 확인하지도 않는다. 그것도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다. 술을 마시고 집을 못 찾거나 길바닥에 누워 있는 것도 아니다. 취해서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여자들에게 찝쩍거리는 것도 아니다. 늦은 밤 술냄새를 풍기며 자고 있는 아들을 끌어안고 뽀뽀를 하는 것도 아니고 술상을 차려달라고 말해 본 적도 없다. 술은 대부분 집에서 반주로 마시거나 술만 마실 때는 안주도 내가 직접 만들어 먹는다. 술에 관해서는 아내의 어떤 도움도 요구하지 않는다.

술을 마시고 주정을 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한 잔도 하지 않는 사람에겐 주정으로 들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최근에 들기는 했다. 술기운이 오르면 평소에 하던 철학적 이야기를 꺼내 놓지만 아내에겐 주정 일 뿐인 것 같다. 한잔하고 뱉는 모든 말을 주정으로 치부해버려서 이젠 말없이 마시기만 한다. 더 이상 억울한 주정뱅이가 되고 싶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아내가 음주를 반대하는 단 한 가지 이유는 나의 건강이 걱정된다는 것이다.

솔직히 그대가 주는 스트레스가 내 건강에 더 위험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나의 건강은 나뿐 아니라 우리 가정을 지키는 무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름대로 온몸의 컨디션에 촉각을 세우며 술을 마신다. 배가 나오는 것 같으면 잠시 멈추기도 하고 자주 피곤하거나 맥없이 습관적으로 마신다고 생각하면 조절하는 편이다. 그래봐야 술을 입에도 대지 않는 사람에겐 여전히 술꾼일 뿐이다. 어쨌든 나도 나름 관리하면서 마신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아내는 언제나 내게 금주를 강행할 명분을 찾고 있었는데 그러던 중 방법을 찾은 듯했다.

검진센터를 다니던 아내는 내원하는 환자 중 술 때문에 검사 결과가 좋지 않게 나온 사람들을 많이 봤고 내 건강에 이상이 있다는 검사 기록이 있다면 나를 설득 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날부터 병원으로 가져갈 나의 피를 노리기 시작했다. 주삿바늘이 싫어서 감기에 걸려도 병원에 가지 않는 사람의 피를 뽑겠다니! 꿈도 야무지다.

더군다나 술을 자주 마셔서 나의 피는 순수한 검사 결과를 기대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피를 뽑을 타이밍을 내어주지 않았다.

그렇게 여러 달이 지나고 술을 마시지 않고 잠들었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누군가 나의 팔을 끌어당기는 느낌이 들었는데 꿈은 아닌 것 같았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주사바늘이 나의 팔에 꽂혀서 모기처럼 내피를 빨고 있었다. 아차 싶었다. 방심 한 것이다. 몸을 움직이면 더 아플까 봐 꼼짝도 하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아내에게 제압당하고 있었다. 채혈은 금방 끝났지만 허락 없이 벌어진 순식간의 일에 어안이 벙벙했다.

검사 결과만 나오면 나의 음주도 끝이라는 듯이 아내는 나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턱을 치켜세우며 자신감을 보였다. 내 눈앞에 의학적 문자가 적힌 하얀 종이라도 보여주며 이젠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말할 것 같은 아내가 며칠째 아무 말이 없었다. 궁금해진 내가 물어봤다.

< 검사 안 나왔어? >

< 나왔어! > 대답에 짜증이 섞여 있었다.

< 멀쩡하지? > 내가 놀리 듯이 물어봤다.

아내는 억울하다는 듯 이야기했다. 의사선생님이 검사 결과를 보시고는

<아저씨는 술을 더 드셔도 되겠는데요?!>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내는 이럴 수는 없다며 잔뜩 약이 올라있었다.

< 내가 알아서 관리한다니깐~~>라며 무심히 위로(?) 했다.

나의 금주를 위해 벌어진 해프닝은 다행히 건강에 이상이 없는 것으로 끝났지만 항상 신경 쓰고 있다. 내 몸은 내 몸이 아니므로...


아내에게 모든 자유를 빼앗기고 달랑 한 잔술의 소소한 행복으로 삶을 연명하는 중년의 남자에게 금주를 강요한다는 것은 너무도 잔인한 일이다. 나는 꽉 잡은 술잔을 절대 놓지 않을 각오로 살고 있고 그날 나에게 패배한 아내는 아직도 호시탐탐 내 피를 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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