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양은 밥상과 막걸리가 그리워서...
내게는 나를 형이라고 부르는 동갑내기 동생이 있다. 외삼촌의 아들인데 내가 6개월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어른들은 나를 형으로 임명했고 녀석은 자연스레 사촌동생이 되었다.
어릴 때 우리는 죽고 못살 만큼 친한 사이였다. 듣기만 하면 같은 동네에서 매일 놀던 사이 같지만 사실 자주 만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사촌은 인천에 살았고 나는 아버지가 군생활을 하시던 경기도 연천에 살던 시절이었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방학이었다. 여름이고 겨울이고 매년 방학만 되면 동생과 함께 충남 당진에 있는 외할머니 댁으로 갔다. 사촌동생도 방학만 되면 할머니 댁으로 오는 것이 약속처럼 되었다. 그렇게 우린 연중 가장 더운 날과 가장 추운 날 만나 한 달 동안이나 살을 비비며 함께 지냈다.
여름방학 때 할머니 댁에서 잠에서 깨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있었다. 김장김치를 담을 때나 쓰는 빨갛고 커다란 다라에 물을 받는 것이었다. 각자가 자신이 사용하는 다라에 순서대로 물을 받았다. 물이 다 받아져야 그날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개구리도 잡고 대나무 활을 만들어서 쏘기도 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실컷 놀고 있으면 할머니가 양은 밥상에 점심을 차리고 부르셨다.
밥을 먹은 후의 스케줄은 정해져 있었다. 물놀이다. 아침에 다라에 받아둔 물은 여름의 따가운 햇살을 담고 놀기 좋은 온도로 데워져 있었다. 오후의 더위를 날리기는 충분했고 오래 놀아도 춥지 않을 아주 적당한 온도였다. 오후 2시쯤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였으니 다라 하나에 두 다리를 밀어 넣으며 쏙! 하고 들어갔다. 우리 셋은 하나씩 다라를 꿰차고 들어가 다라를 참호 삼아 물총을 쏘기도 하고 바가지로 물 폭탄을 던지기도 했다. 할머니는 그늘에 있는 평상에 앉아 지그시 부채질을 하시며 물놀이 안전요원을 겸하고 계셨다.
우리의 안전요원은 정확한 시간에 쉬는 시간을 알려주셨다. 그러고는 육개장 사발면에 물을 부어주셨다.
우리는 수건을 등에 덮고 쪼로미 앉아서 나무젖가락을 씹어가며 육개장이 익어가길 기다렸다. 그때부터였을까? 물놀이 중 허기를 달래는 간식은 컵라면이 최고다.
한 날은 컵라면을 먹고 있는데 할머니가 부엌에서 주전자에 든 무언가를 대접에 따라 드시더니 곧 우리 쪽으로 들고 오셨다.
<자! 이놈 마셔봐~! >
충청도 특유의 여유로운 억양으로 씨~익 웃으며 건네셨다.
우유라고 하기에는 누런빛이 돌았다. 선뜻 마시지 못하고 코를 가까이 대봤지만 알 수가 없었다. 어설픈 탐색으로는 알아낼 수 없다고 확신하고 과감하게 한 모금을 마셨다. 사이다 같은 청정함에 고소한듯하면서도 끝 맛이 달콤했다. 나쁘지 않았다. 한 모금을 더 마시고 사촌동생에게도 먹어보라고 주었다. 녀석도 먹더니 나쁘지 않은지 한 모금을 더 먹고 나를 주었다. 우린 둘이서 대접에 담긴 그것을 모두 마셔버렸다.
대접을 비우고 할머니에게 물어봤다.
< 할머니 이게 뭐야? >
할머니는 꼬마들이 마시는 것이 웃기셨는지 계속 웃으시다가 대답하셨다.
< 막걸리여~ >
우리는 믿지 못했다. 막걸리는 할아버지가 드시는 것이고 술이라서 아이들은 못 먹는 것인데... 어떻게 된 것인지 어리둥절했다.
다음 날 물놀이 중 육개장을 먹는 간식시간에 우리는 비밀을 알 수 있었다.
전날 막걸리를 모두 비운 손자들이 대견(?) 하셨는지 할머니는 육개장에 물을 따르시고는 아예 부엌에서 주전자를 가지고 나오셨다. 대접에 막걸리를 콸콸 따르시더니 설탕을 한 숟가락 털어 넣고 휘휘 저으셨다.
< 자! >
우린 맛을 기억하고 있었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두 놈이 나누어 홀라당 비워버렸다.
그날부터 할머니는 우리가 물놀이를 하고 간식을 먹을 때 종종 달달한 막걸리를 타주셨다. 지금 기억으로도 설탕을 탄 막걸리는 정말 맛있었다.
문득 궁금해지는 것은 둘이서 한 대접을 나눠 마셨는데 우리는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어른이고 술을 좋아하니 막걸리 한 병이야 아무렇지 않지만 아무래도 초등학교 저학년이면 알딸딸해야 정상일 듯한데 우리는 이상할 만큼 아무렇지 않았다. 나의 주량은 그때부터 정해졌을 거라는 추측도 해본다.
건강을 위해 소주 대신 막걸리를 한 잔씩 마시는 요즘에는 할머니 생각이 더 자주 난다.
<보리텐>음료수를 좋아하시던 우리 할무이~~
초등학교 손자들에게 막걸리를 알려주신 진짜 할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