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지개 펴는 시간
퇴근을 코앞에 둔 늦은 밤에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빠~ "
사내놈이 애교스러운 목소리를 할 때는 뭔가 필요한 게 있다는 것이다.
"응 왜~?"
나는 무뚝뚝한 사내놈이지만 아들에게만은 다정스럽다.
"오늘 아빠하고 자면 안될까?"
"무슨일 있어?"
"아니 그냥~ 아빠랑 자고 싶어서~ㅎㅎ"
무슨 꿍꿍이 속이 있을지 잠깐 생각을 했다.
아빠랑은 절대 자지 않겠다는 날이 곧 올 텐데 어쩌면 나는 행복한 고민을 하는 것은 아닐까...
아이의 자립심을 위해 무슨 일이 있어도 본인의 방에서 혼자 자야 한다는 잠자리 교육은 그럴듯하면서도 참으로 여운이 남는 교육이다.
"그래~ 그런데 아빠가 일을 마저 하고 가면 조금 늦을 수도 있어~ 그리고 내일 아침에 이불은 네가 개라~! "
"오케이!~ 알았어! 되는대로 빨리 와~ "
아들의 목소리는 아빠를 한참이나 못 보다가 만나는 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우리가 헤어진 지 불과 6시간 만이었다. 코로나 거리 두기 격상으로 또다시 학교에 가지 못한지 이틀이 지났다. 오전에 ZOOM 수업을 하고 나와 함께 출근을 하면 오후에 엄마가 데리러 오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그러니 아들이 집에 돌아간지 달랑 6시간 만이었다.
남은 잔업이 있었지만 기다리는 아들이 눈에 선해서 내일로 미루고 바로 퇴근을 했다.
귀갓길에 집 앞에서 막걸리 한 병을 샀다. 나의 늦은 저녁상 옆에 아들이 앉아서 수다를 떨 테니 나는 느긋하게 막걸리로 반주를 하며 말동무가 될 생각이었다.
아들은 내가 현관에 들어가자마자 큰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다녀오셨어요~~ " 쇼파에 앉아서 말이다.. (이런...)
"앞에 나와서 해야지 인마! " 힘주어 말했지만 무겁지 않은 말투였다는 건 아들도 눈치챘다.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주방에서 늦은 저녁을 차리는 나를 쉴새 없이 불렀다.
"아빠~ 이리 와봐! ... 아빠~ 이리 와봐! "
간단히 차려서 밥상 앞에 앉으니 아들이 옆에 나란히 앉았다. 나는 저녁이고 아들은 야식이 되는 셈이다.
모두 잠든 시간 혼자 밥을 먹을 때는 보통 TV를 켜고 반주를 곁들인 식사를 하는 편이지만 아들이 옆에 앉는 날엔 되도록 TV를 켜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아들과 대화를 해보려는 노력의 시작이다.
아직은 수다가 많은 아들이 쉴 새 없이 이야기를 꺼낸다. 더러 내겐 관심 없는 주제라도 <와우!>라는 리액션을 취하고 무덤덤하게 밥을 씹는다.
이렇게 늦은 시간 함께 앉아서 이야기를 하다 보면 두서없는 이야기가 참으로 많이 나온다.
아들이 평소에 생각하던 기발한 생각도 들을 수 있고 요즘의 관심사도 들을 수 있다. 막걸리가 지긋이 들어간 나는 아들이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를 인생사에 대해 털어놓기도 하는데 반응은 반반이다. 예의상 내 이야기를 들어주기도 하고 때론 내 말을 자르고 자기 얘기를 하기도 한다. 그럴 땐 굳이 버릇없다고 훈육을 하기보단 친구처럼 웃어넘기는 편이다.
무슨 연유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제는 아들이 갑자기 가져온 지구본을 두고 여러 이야기를 했다.
"아빠! 미국은 정말 크네? 캐나다는 북극 근처에 있으니 엄청 추울까? 우리나라가 좀 더 컸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작네! " 유식하지 못한 아빠는 아는 상식에 대해서만 이야기해주고 모르는 것은 함께 찾아보자고 하며 네이버나 유투브를 검색해서 함께 보는 편이다.
와중에 미국 이야기가 나와서 미국 건국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신대륙의 발견, 인디언을 총칼로 몰아내고 주인이 된 이야기, 미국 영화를 접하며 자연스럽게 백인에 우호적으로 길들여진 이야기 등등 깊이가 있지는 않았지만 아는 한에서 이야기해주었다. 아프리카 대륙의 국경이 자로 잰 듯 반듯한 이유도 함께 이야기해주며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했던 이야기를 예로 들어주었는데 다소 혼란스러워하는 눈치였다.
분명 백인들이 살고 있는 미국과 유럽의 발전된 여러 나라들은 착하고 좋은 나라라고 알고 있었는데 아프리카 대륙을 식민지화했던 그들의 역사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들과 함께하는 말장난도 있지만 나는 역사라든지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넌지시 던지곤 한다. 아들이 모두 알아듣고 기억할 거라는 기대를 하지는 않는다. 다만 한 번이라도 들었던 이야기라면 언젠가 비슷한 공부를 할 때 좀 더 찾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그래서 내가 성장 할 때보다 좀더 객관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좋지 않을까?!
때론 맞장구를 치며 질문을 하고, 때론 이해할 수 없다는 멍한 표정을 지으며 함께 시간을 나누던 나의 작은 동무는 "아빠 빨리 와"라는 말을 남기고 12시가 넘어서야 이불 위에 누웠다. 아들은 금세 잠이 들었다.
이불을 걷어차고 쪼그려서 자는 아들 위로 이불을 덮어주고 나도 곁에 누워 불을 껐다.
매일 늦게까지 일해서 많이 놀아주지 못하고, 잘 못했을 때는 엄하게 혼내는 아빠를 이렇게나 기다려주고 반가워해주는 아들에게 항상 고맙다. 3학년이니 이제 1~2년이 지나면 함께 자고 싶다는 이야기도 없을 테고 친구들과 만든 세상 속으로 들어가며 나와도 거리가 생길 것이다. 그때까지 함께 할 수있는 시간에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이다. 어제도 나의 작은 친구가 있어 행복하게 하루를 보내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