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엔 소주 한 병과 마른안주

<내가 죽거든 술독아래 묻어줘 술독이 셀지 모르쟎아!>

by nAmsoNg


대학교 1학년…

지금 생각해보면 징그러울 정도로 술에 집착했었다. 대학 진학 전까지 타이트한 귀가시간과 엄한 아버지의 교육방침은 나의 날개를 접었다기 보다는 잠시 꺾어 놓았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였다. 물론 그 날개는 성장의 전반적인 과정을 위한 날개는 아니었다. 아버지의 가정교육으로 다행히 4년제 대학을 경험했고 반듯하게 자랐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단지 아쉬운 것은 억눌린 날라리 근성이 고교시절까지 꽁꽁 묶여 있었다는 것이다.


대학은 새로운 세상이었다. 꺾어 놓았던 날개를 정비하고 <놀자 대학생> 모드로 들어갔다.

여기에 큰 힘을 준 것은 체육과의 거친 선배들이었다. <동기애>라는 미명하에 하루가 멀다 하고 눅눅한 지하의 체육관으로 집합시켰다. 수업이 없는 날이라도 집합이 공지 되면 학교를 와야 했다. 엄한 아버지 아래서 타이트하게 생활한 내게는 가혹함의 연속이었다. 내가 꿈꾸던 대학은 잔디밭에 자유롭게 앉아서 철학적 이야기를 서슴없이 논의하며 지성인의 흉내를 내는 것이었다. 선배들에게 걷지도 못 할만큼 빳다를 맞은 날부터 나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학교에 가더라도 수업엔 참석하지 않고 동아리방에 틀어박혔다. 그곳에서 만난 다른 과 선배들과 술을 마시며 나누던 철학적 논쟁으로 대학생활에 희열을 맛보던 때였다.

수도권의 학교였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막차가 끊기기 전에 출발하려면 저녁 7시에 동아리방에서 나가야 했다. 7시가 어떤 시간인가! 저녁을 먹으며 술자리가 시작되는 시간이 아니던가! 길어지는 논쟁으로 집에 들어가지 않는 날이 잦아졌다. 집에서 쫓겨날 각오도 했다. 선배들과의 철학적 논쟁은 내가 대학에 진학한 이유를 선명하게 느끼게 해주었다. 내게 대학은 꼭 가야 한다며 등을 떠밀던 아버지에게 부끄럽지 않은 외박이었다. 그 술자리에서 나누는 명제 없는 논쟁은 나의 네모난 가치관을 마구 흔들었다. 대학은 그런 곳이 돼야 했다.

점점 동방에서 살다시피 했다. 주된 활동이 야영인 동아리라 간단한 취사도구도 있어서 친구들이 가져다주는 쌀로 밥을 해먹기도 했다. 대학의 학생증이 없었다면 노숙자라 해도 믿을만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옷 따위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나의 머리가 깨어있고 나의 행동이 바르다면 옷은 잘 빨아 입고 만 다니면 되는 껍데기 정도였다. 당시 나는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가방에는 체육과 운동복을 넣고 다녔다. 옷을 빨아야 할 때쯤 집에 들어가 옷을 벗어놓고 새 옷을 입고 학교로 가출했다. 가출이라기보다는 논쟁의 술자리로 출석한 것 같았다. 그리고 여벌의 옷과 함께 가방에 들어있던 것은 소주 한 병과 전날 먹다 남은 술안주였다. 먹다가 목구멍에 밀어 넣지 못한 소주는 다음날을 위해 가방에 넣었다. 간단히 요기를 할 수 있는 마른안주나 컵라면도 예외가 아니었다. 가방 안에 소주로 어디서든 술을 마실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든든하게 했다.


비가 내려 감성이 젖기 시작하는 날 주점까지 가지 않고 처마 끝에 앉아서 소주를 꺼냈다.

일단 목을 축이고 파전이 있는 주점으로 이동했다.

예쁘게 숨어버리는 노을과 마주칠 때면 학교의 노천극장 스탠드에 앉아서 소주를 꺼냈다. 이때는 함께 준비한 마른안주가 톡톡히 역할을 한다. 심심한 안주지만 떨어지는 노을이 이미 충분한 안주가 되었다.

햇살 좋은 어느 날은 종종 잔디밭에 앉아 공강의 시간을 잡아먹었다. 배꼽시계가 점심시간을 알리고 짜장면을 시키면 나는 가방에서 씨아시도 되지 않은 소주를 꺼냈다. 따스한 대낮에 마시는 미지근한 소주는 우리를 발동시키기 충분했다. 언제나 내가 가진 단 한병의 소주가 새벽까지 이어지는 술자리의 씨앗이였다. 발동이 걸린 우리들은 술이 가까운 곳으로 자리를 옮겨서 작정하고 마시기 시작했다.


가방에서 숨죽이고 있던 술은 언제나 정확한 때와 장소에서 빛을 발했다.

함께 있던 누군가가 술 한 잔이 생각난다는 말을 하자마자 나는 가방에서 꺼낸 술로 술상을 차렸다. 대부분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때론 움직임 없는 몸뚱이로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이것이 감동의 시그널인지 또라이를 만난 당혹스러움인지 헷갈릴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개의치 않았다. 법적으로 충분히 성인이었고 내 가방의 술은 훔친 것도 아니었다. 떳떳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나를 만나서 당장 술한방울이라도 목구멍에 떨어뜨릴 수 있는 것을 감사히 생각하라는 듯 갑의 입장에 섰다. 물론 만족스러운양은 아니었다. 우리의 밤을 위로하기엔 많이 부족했으므로 시동을 거는 역할로 충분했다. 그 한병의 소주가 씨앗이 되어 술자리가 만들어지고 주(술) 님의 세계로 인도당해 정신을 잃고 쓰러져간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새벽에 동아리방에 촛불을 켜고 진정으로 대화의 주인공이 되는 자는 나를 포함해 고작 3~4명이었다.

가방 안의 소주 한 병은 나의 대학 1학년을 낭만적으로 보내게 해주었다. 대신 학사경고 2회라는 오점을 남기고 이듬해 2월 나는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다.

(군 입대도 술과 관련된 사건으로 급히 결정된 일이라 다음에 이야기 하도록 하겠다.)


고삐 풀린 망아지 같았던 대학 1년은 내 생에 최고의 자유인이었고 세상의 모든 낭만을 마시고 다닌듯하다. 전역 후부터는 가방에 소주를 넣고 다니기를 자제했다. 나이 값이 신경쓰였고 나이값이라는 것을 계산 할 수 있을 때부터 자유를 잃었다. 불혹의 나이가 버텨내야 하는 삶의 무게가 버거울 때면 나의 20살이 생각난다.

아무 계단에 앉아 소주에 오징어를 씹어도 욕먹지 않을 젊음이 그립다.

한적한 공원 벤치에 홀연히 앉아 가방에서 소주를 휙! 꺼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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