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편지가 보내진 다음 날 저는 일본으로 여행을 갑니다. 제 의지로 계획한 여행은 아니고 가족여행으로요. 일본은 가까우니까 맘만 먹으면 가겠지 싶어 막상 여행 갈 기회가 생기면 이때 아니면 언제! 싶은 마음으로 항상 유럽 또는 동남아로 떠났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정도 여행을 다녔다 싶은데도 정작 일본은 십년도 더 전에 한번, 가족과 패키지여행으로 잠깐(솔직히 이 여행의 존재조차 이 원고를 쓰면서 떠올랐습니다.). 두 번이 고작입니다.
그런 것 치고 나폴리탄은 저에게도 꽤 친숙한 파스타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어렸을 때는 일본 드라마라든가, 일본 노래, 일본 만화에 둘러싸여 살았거든요. 이탈리아에 나폴리 지역이 있다는 걸 알기 전부터 나폴리탄을 알았습니다.
나폴리탄은 우리나라의 왕돈까스와 닮았습니다. 뭔가 분명히 양식인 것 같으면서도, 미묘하게 푸근한 매력으로 동양 음식 못지않게 친숙함을 선사합니다. 넓고 얇게 두드려 튀긴 돼지고기에 달짝지근한 돈까스 소스를 와장창 덮은 다음, 심심한 듯 은은하게 고소한 묽은 수프와 곁들여 먹는 경양식 왕돈까스. 소면처럼 푹 삶은 파스 타면을 넣고 달큰한 케첩과 오도독 터지는 비엔나 소시지를 달달 볶아 흰 치즈 가루를 톡톡 뿌려 먹는 나폴리탄.
이제는 무국적에 가까운 나폴리탄은 레드 와인도 잘 어울리고, 시원한 맥주와도 찰떡입니다. 그러면서도 급식 반찬 같은 소박하고 따듯한 면도 있죠. 어찌저찌 토마토 파스타라고 쳐줄 수도 있겠습니다만 혀를 맴도는 케첩의 달달함에 가끔은 추억의 불량식품이 떠오르기도 하고요. 안주의 역할도 충실히 해내기에 이자카야에서도 심심치 않게 보입니다.
나폴리탄의 정체 모를 매력을 후루룩 후루룩 즐기다 보면 문득 일상이 아득할 때가 있습니다. 어쩐지 사연 있어 보이는 심야식당을 떠올리다가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나면 이제 설거지가 남은 집인 걸 깨달을 때의 괴리감이라고나 할까요. 그럴 때 이 요리가 더 재밌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가장 쉽게 떠나고 싶을 때 나폴리탄을 만들어 먹곤 합니다. 집에 피망이라든가 소시지를 구비해두는 편이 아니라서 나폴리탄을 먹고 싶다면 신경 써서 나폴리탄을 위한 장을 봐야 합니다. 어디에나 쓰여서 생필품처럼 집어 들고 보는 양파나 감자를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요리만을 위한 장을 볼 때는 그 자체로 나에게 신경 써주는 느낌이 듭니다. 근데 이 파스타가 만들기는 또 엄청 쉽거든요. 알덴테? 그런 용어는 나폴리탄의 사전에 없습니다. 그냥 푹 삶아도 됩니다. 통통히 불은 파스타 면이 잘 어울리는 요리에요. 토마토소스? 굳이 없어도 됩니다. 애초에 케첩 스파게티라는 별명이 있는 친구거든요.
그런데도 막상 만들고 보면 은근히 근사해 보입니다. 한마디로 있어 보이거든요. 나폴리탄만 가질 수 있는 미워할 수 없는 허세스러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나폴리탄에 맥주를 곁들이는 걸 좋아해서 보통 주말이 오는 저녁에는(그러니까 오늘 같은 금요일이요!) 캔맥주도 같이 사 오곤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맛있어요. 떡국을 먹다가 엽떡을 먹었을 때 굳이 말하지 않아도 혀에서부터 느끼는 쾌감과 같다고나 할까요. 들척지근한 케첩 맛을 조금 과장해 묘사하자면 없는 추억도 떠올리게 하고요.
가끔은 스시보다 나폴리탄이 더 일본요리같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쉬운 요리법마냥 쉽게 떠나는 기분을 즐길 수 있지 않나 싶어요. 이럴 때마다 영락없이 요리는 먹는 사람의 경험을 씌운 매개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오늘 밤에야 부랴부랴 내일 떠날 짐을 챙길 예정입니다만, 일본에 갈 계획이 아니었더라도 이런 날에는 종종 나폴리탄을 해 먹었을 거에요. 어쩌다 ㅇㅇ님도 나폴리탄과 함께하는 시간이 있다면, 떠나고 싶을 때 먹는 파스타라는 제 감각이 전해졌으면 합니다.
[해당 내용은 담파스타 레터의 일부입니다. 원문은 아래에서 확인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