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밝았을 때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소망이 담긴 계획을 품습니다. 물론 저를 포함해서요. 매년 익숙하게 보이는 새해 목표들은 새롭지 않겠지만요. 운동, 독서, 공부, 재태크, 자격증, 다이어트 등등.
사실 어떤 결심과 함께든 처음은 그 자체로 설레고 두렵습니다. 말 그대로, 처음이니까요. 길잡이 없이 나아가야 하니까요. 예상이 되지 않는 불확실성에 압도되면서도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일이 찾아올지 몰라 기대에 부풀게 되니까요. 회사에서 보고서 하나 작성할 때도 이전 문서 형식을 살펴봐야 하고, 새롭게 찾아낸 맛집이 어떨지 몰라 리뷰를 먼저 찾아보는 게 부지기수인 일상에서 아무것도 짚이는 게 없는 완전한 ‘처음’을 마주한다는 건, 점점 더 드물어지는 현상일지도 모릅니다. 이 험난한 세상에서 그런 불명확성은 위험하고 피로한 일임은 틀림없지만 그래서 새롭고 신선합니다.
일상에 매몰되다 보면 그런 처음을 마주하는 일은 사실 많지 않습니다. 한정된 에너지와 시간 안에서 처음이 주는 부담과 기대는 자칫 버거울 수 있거든요. 실패로 이어질 수도 있는 천진한 시도가 용납되지 않는 사회 속에서는 더욱 처음 앞에서 주저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더욱 처음 맛보는 음식은 특히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교적 간단하고, 큰 부담 없이 시도해 볼 수 있으니까요. 새로운 맛을 접하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 내 세상을 가장 쉽게 넓힐 수 있는 방법이거든요. 그때의 경험이 입맛을 형성하고, 취향을 만듭니다.
제가 스무 살 때 먹어본 페쉐 파스타가 그랬습니다. 파스타 가게에서 아르바이트하던 때였어요. 당시에 페쉐 파스타는 뚝배기 파스타, 국물 파스타 또는 해장 파스타라고도 불렸습니다. 메뉴 이름 아래에는 ‘해물을 넣어 매콤하고 얼큰하게 끓여낸 토마토 뚝배기 파스타’ 같은 설명이 쓰여 있었고요. 분명히 파스타는 외국 음식인데, 해물탕집에서나 볼 법한 ‘얼큰’, ‘뚝배기’, ‘해장’ 같은 단어가 붙다니 요상했습니다. 해장이라고 하니 술을 잔뜩 먹고 난 다음날 먹어야 더 맛있을까 싶기도 했어요. 그리고 그 맛은, 정말 딱 저 설명이 어울리는 맛이었습니다. 토마토 파스타, 크림 파스타, 오일 파스타로 나뉜 메뉴판 삼국지 속 토마토 파스타와 비슷한 듯하면서도 전혀 같지 않은 페쉐 파스타는 그 자체가 하나의 장르처럼 느껴졌습니다. 일하던 파스타 가게에 가족 손님들이 외식을 하러 오면 아버지들은 대부분 이 페쉐 파스타를 주문하곤 했습니다. (저처럼 ‘얼큰’, ‘해장’이라는 단어에 이끌려 주문 전에 이게 무슨 스파게티인지 물어보는 일이 종종 있었어요.) 정말이지 한국인 맞춤 메뉴였습니다. 항상 매출 상위권에 있던 메뉴로 기억합니다.
최근에 갑자기 그 페쉐 파스타가 먹고 싶어진 거예요. 제 머릿속 페쉐 파스타는 언제나 국물이 있는 매콤한 파스타였기에 물을 잔뜩 넣고 원팬 파스타로 팔팔 끓여 만들었습니다. 페페론치노도 가득 넣어서요.
그리고 페쉐 파스타 이야기를 쓰려고 잠시 찾아보니 웬걸, 페쉐(Pesce)는 해물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뚝배기나 매콤함보다는 해물이 키포인트였던 메뉴였던 거예요. 이탈리아의 토마토 해물 수프(Zuppa di Pesce)에서 착안한 파스타인 거죠. 그리고 제 원팬 페쉐 파스타는 해물 따위는커녕, 그저 냉동실에서 묵어가던 얇은 냉동 새우 몇 개가 떠올라 마지막에 급하게 넣어준 게 다였습니다.
배신감이 느껴지려던 찰나 이내 허탈한 웃음이 나왔습니다. 프랑스어에도 페쉐와 비슷한 해물을 뜻하는 단어가(Pêche) 있습니다만, 전혀 연관 짓지 못하고 오로지 예전에 처음 접한 해장 파스타로만 각인되어 있던 거예요. ㅇㅇ님, 처음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하물며 첫인상은 평생 간다는 말도 있잖아요.
저는 앞으로도 페쉐 파스타를 요리할 때 해물을 굳이 사서 넣을 생각이 없긴 합니다. 대신에 청양고추를 넣어볼 수는 있겠죠? 제 세상에서 페쉐 파스타는 그런 파스타거든요. 고집이라면 할 말은 없습니다만 이 팍팍한 세상에 ‘나의 처음’을 낭만적으로 간직하고 소소하게 기념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일상의 재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니 올해는 ㅇㅇ님도 나만의 처음을 만나는 순간을 최대한 자주 접할 수 있는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작심삼일로 끝날 계획일 수도 있고, 기대만큼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있을지라도 처음이 가진 미지의 세계가 내 세상과 연결되는 고유한 순간은 충분히 도전할 가치가 있으니까요. 그 처음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가, 갑자기 입맛 당기는 어느 날 페페론치노 듬뿍 넣고 팔팔 끓여서 추억으로 만들어 먹는 날도 있을 테니까요.
[해당 내용은 담파스타 레터의 일부입니다. 원문은 아래에서 확인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