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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갱이 Oct 18. 2021

우울한 날엔 글이 쉽게 쓰인다.

짧은 글 조각 모음

우울한 날 쉽게 쓰인 글들


2019. 7

견뎌내려 무던히 노력했다. 그럴 수 있다 생각했고, 그래야만 했으니까. 버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누누이 듣고 수없이 깨닫건만 나는 왜 스스로에게 너그럽지 못한 지. 아무 이유 없이 그래도 되는 일이 있긴 한가. 중력이 없었다면 내게 얹힌 짐이 조금이라도 덜 무거웠을까. 내가 사는 지구만 달라서, 그래서 점점 더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건 아닐까. 차라리 비가 내 처지보다 나을지도 모르겠다. 무거워지면 아래로 쏟아져 내리기라도 하지. 난 둥둥 뜨지도 못하고, 가라앉지도 못하고, 어딘가에 스며들지도 못하니. 내가 취할 수 있는 태세라는 것이 있긴 할까.




2019. 8

진심은 읊조리는 게 아니라 토해내는 것. 하나를 밝히면 둘, 셋 뿐만 아니라 무한 개를 뱉어내는 것. 참았던 구역질 같은 것. 입을 다물면 그 작은 입술 틈새로 새어 나오는 것.




2019. 10

사무치는 그리움에 눈을 감으면 더 선명해지고. 견딜 수 없어 눈을 뜨면 잔상이 둥둥 떠다니고. 그게 현실 같아 그저 닿고 싶어 허공을 더듬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지고. 너는 환상, 신기루, 공중누각, 그리고 이루지 못할 꿈.




2019. 12

감정적으로 연약한 사람은 주변에 의해 쉽게 흔들린다. 그래서 넌 머리카락 몇 가닥을 겨우 휘날리게 만들 만큼 위력 없는 미풍에도 한 줄기 억새풀처럼 요동치곤 했다. 촛불과 비슷하기도 했다. 네가 종종 흘리는 눈물은 설움과 심려의 농도가 짙어 촛농 같았다. 혹여나 네 뺨 위에서 응고될까. 굳기 전 닦아내어 주려 내 소매를 더럽힌 게 언제부터였는지. 넝마가 된 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아도 도통 헤아려지지 않는다.




2020. 4

지쳤다. 무언가를 알아가는 것에. 형체가 없는 것과 뒤섞이고 얽히며 내가 정의한 어떤 것에 대해 잊어가고, 잃어가고. 무한한 반복. 유한적인 관계.




2020. 5

나의 우울은 멀리 있지 않다. 늘 그 자리에 있어서 한 발짝만 내딛어도 잡힐 만큼 가깝다가도 그 반대편에 있는 기쁨을 찾아 돌아서면 어느새 아득히 멀어져 있다. 정말 지겨운 건, 정말 멀리 달아났다 생각했는데 눈앞에 있는 것처럼 선명하다는 것이다. 지금의 나는 우울과 1m 거리에 서있다. 무언가 등을 툭 밀치면 그것에 둘러싸일 만큼 가깝다.


나는 나를 갉아먹는 것에 익숙하다. 내가 화낼 일에 화내지 못한다. 분명 어떤 것 때문에 상처를 받았으면서 그걸 말하고 나서는 후회한다. 내가 이해하고 잘 넘길 수 있었는데 그거 하나 참지 못해서 결국 이렇게 된 거라고. 난 참 속이 좁다고. 내가 잘못 살았구나, 하나라도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 세상의 수많은 톱니바퀴 중에 하나는 될 줄 알았는데 그 톱니바퀴를 돌아가게 하는 부품조차도 안 되는 보잘것없는 사람이었구나. 결국,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어야 했다고 체념하게 된다. 살아있음을 불행이라고 느끼며.




2020. 6

오늘을 살면서 어제를 만회하기 위해 애써야 하며, 내일을 위해 오늘도 쉬지 않고 달려야 한다는 게 참 이상하지. 현재에만 충실하면 내일의 내가 오늘을 후회하게 만들잖아. 애초에 모순 덩어리인 세상에 던져놓고 타당하고 합리적인 것들을 어떻게 찾으라는 건지. 불확실한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의 행복을 버려야 하고, 그 행복을 지금 느끼기 위해서는 내일 올지도 모르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니. 웃기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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