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이 여행의 목적이 될 수 있나요?

#000. Prologue

by Muse u mad

"여행 가서 뭐 했어?"

"박물관 몇 군데 다녀왔어."

"왜?" or "아..."

내가 여행을 다녀온 이후 누군가와의 대화는 보통 이렇게 이어진다.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어보거나, 아니면 더 이상 다음 말을 잇지 않는 경우이다. 나도 쇼핑을 목적으로 여행 가는 사람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니 누구나 목적은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나 같은 사람을 잘 찾기는 어려워서 박물관이 여행의 목적이 되는 이유를 쓰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려고 한다.



박물관의 정의

먼저 박물관을 정의부터 해보자. 우리에게 박물관은 고고학적 유물이나 수집품을 모아 전시하는 곳 정도로 인식될 것 같다. 미술관을 구분해 지칭하다 보니 더 협소하게 정의를 생각한다. 그러나 국제박물관협의회(ICOM: International Council of Museums)는 박물관을 "유무형 유산을 연구·수집·보존·해석·전시하여 사회에 봉사하는 곳"이라고 매우 광범위하게 정의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전국문화기반시설 총람을 보면, 박물관은 물론 전시관, 기념관, 유적, 민속관, 자료관 등까지 포괄하여 리스트업 하고 있다. 영어에서는 Museum에 미술관도 포함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미술관은 별도로 구분하여 박물관에 포함하지 않는다. 내가 앞으로 글을 쓰는 범위도 ICOM의 박물관 정의에서 미술관을 제외한 곳이 될 것 같다.



부모라면 누구나 하는 고민, 아이랑 어디 가지?

아이가 어리던 시절, 주말만 되면 어디든 아이와 함께 할 곳을 찾았다. 아이가 지루해하지 않아야 하고, 비가 오던 눈이 오던 날씨에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하고, 여유의 틈이 있어야 하고(내가 너무 힘들지 않아야 하니), 너무 많은 사람으로 북적이지 않고, 비용 부담이 낮아야 하고, 접근성이 좋아야 하고, 안전해야 하고, 그리고 무해한 곳. 하나 더, 아내가 흔쾌히 동의하는 곳.

처음부터 이 까다로운 조건에 맞는 곳이 박물관일 줄은 몰랐다. 시작은 그저 우연찮게 발걸음을 옮겼을 뿐이었다. 아이와 한두 번이라도 박물관을 가본 사람들을 알 것이다. 요즘 박물관은 전통적인 ‘정적인’ 공간이 아니다. 체험 행사, 인터랙티브 전시, 3D 전시, 어린이 전용 공간, 스탬프 투어 등 어린이와 부모의 니즈에 맞춘 꽤나 ‘동적인’ 공간이다. 게다가 무언가 학습적인 경험까지 준다는 부모 입장의 심리적 안정감까지. 물론 지금 아이에게 물어보면 어렴풋하게나마 기억하는 것도 손에 꼽을 뿐이다. 잘 기억할 거란 기대는 금물이다. 그럼에도 에듀테인먼트(Edutainment)를 가장 잘 실현한 곳이 박물관이란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전국에 916개의 박물관이 존재한다(2024 전국문화기반시설 총람 기준, 문화체육관광부). 2024년 국립박물관 14곳의 방문객 수만 1천만 명을 넘었다. 2024년 국립중앙박물관의 관람객 수는 전 세계 8위에 랭크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공간이지만, 박물관을 대변하는 수치가 이렇게 높을 줄은 몰랐다.


경기도어린이박물관 전경.jpeg 아이와 처음 갔던 경기도어린이박물관 (출처: 박물관 홈페이지)


아이보다 내가 더 몰입하게 된 공간

체험코너를 같이 즐기고, 아이를 따라다니며 전시물을 설명해주다 보니(물론 아이는 별 관심이 없다) 부모로서 역할을 잘하는 것 같은 뿌듯함도 든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아이가 다 본 전시를 지나치고 다른 곳으로 가도 나는 그 자리에 남아 설명 글을 끝까지 읽고, 내가 아이에게 조금 더 잘 설명해 주고 싶다는 욕심도 생기고, 책에서 봤던 또는 다른 곳에서 봤던 유물이나 전시물과 연결되면서 깨닫게 되는 범위가 넓어지고, 그래서 또 다른 역사와 박물관이 궁금해지고, 더 자세하게는 책을 보면서 지식을 보충하고... 지금은 해외여행을 통한 세계사까지 관심영역이 확대되었다.

서양 중심적 사관에서 벗어나게 된 계기도(사대주의에서 벗어나게 된 계기도), 문화적 다양성을 수용하게 된 계기도, 소위 국뽕이 아닌 세계사 안에서 우리를 객관화하게 된 계기도 어찌 보면 박물관이 그 시작이었다. 우물 안에 갇혀 편협한 세계관을 가졌던 그 시절을 돌아보면 부끄럽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은 어디든 휴양과 박물관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갖고 여행하고 있고, 박물관을 통해 그들의 문화와 종교, 생활상의 역사를 현재와 연결해보고 있다.




소셜 미디어에서도 관심 없는 박물관

여행 유튜버가 가장 외면하는 콘텐츠가 박물관이라고들 한다. 보통 유튜버들은 텐션이 높은데, 그 텐션을 발현하기 가장 어려운 장소이기도 하고, 플래시를 터트리거나 영상 촬영이 안 되는 장소가 많다는 점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박물관은 '느린' 콘텐츠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단순히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공급자는 역사적∙시대적 맥락을 포함해 짧지 않은 설명을 제공해야 하고, 수요자는 깊이 있는 생각을 해야 하는 콘텐츠라는 것이다. 즉 도파민이 거의 터지지 않는 콘텐츠이다. 심지어 나처럼 박물관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조차도 진지하고 느린 영상의 호흡을 따라가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박물관에 흥미를 붙이게 된 이유는 세 가지이다. 누군가가 잘 다루지 않다 보니 오히려 나에게는 더 가치 있는 콘텐츠 주제로 다가왔던 것 같다. 누군가가 가지 않는 길 위에서 혼자만의 보물을 찾은 느낌이랄까, 내 선택과 행동에 만족감을 느끼는 자기만족의 감정이었다.

다음으로, 획일화된 패키지 여행처럼 여행 콘텐츠마저 획일화되어 가는 것에 지쳐가고 있었다. 당연히 나도 여러 매체를 통해 사람들의 후기를 검색하는데, 항상 뻔한 관광지와 식당, 카페, 쇼핑장소가 나온다. 그럼에도 가보면 한국인지 외국인지 모를 현지 느낌 거의 없는 분위기, 마음에도 머리에도 남는 것 없이 몸만 피곤한 허탈감이 쌓이기 시작했다. (물론 나와 다른 스타일로 여행하는 사람들을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다. 내 개인이 그렇게 느꼈을 뿐이다) 그래서 무언가 다른 걸 찾고 싶었던 마음이 그 나라와 그 지역의 역사, 그리고 박물관으로 향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원래 역사책을 즐겨 보던 나에게 박물관은 머리로만 알던 것을 오감을 통해 느끼게 하는 희열감을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구화된 사관에 익숙한 나에게 현지의 박물관들은 선입관과 편견을 깨고 관점을 바꿔주는 짜릿함을 주었다. 새로운 지식의 습득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박물관, 생각보다 재밌는 공간입니다


이런 박물관도 있어요?

박물관은 '지루한 역사 이야기', '공부하는 장소', '전문가의 영역' 같은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지 않는 것 같다(물론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같은 곳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상술했듯이 전국에 소소한 박물관들이 너무나 많다). 물론 무거운 주제를 다루기도 하고, 이해하기 쉽지 않은 주제를 다루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916개의 박물관 수만큼이나 다양한 주제의 박물관들이 존재한다.

둘리뮤지엄(서울시 도봉구), 떡박물관(서울시 은평구), 짜장면박물관(인천시 중구), 여주시립폰박물관(경기도 여주시), 라디오스타박물관(강원도 영월군), 복권박물관(충남 천안시), 진안가위박물관(전북 진안군), 그리스신화박물관(제주도 제주시). 우리나라에 이런 박물관들도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마 잘 없지 않을까? 우리가 생각하는 지루한 '역사'가 아니더라도, 본인이 흥미를 가질 수 있는 곳부터 선택해서 다녀보면 재미를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더 다양한 곳을 찾아보고 싶다면 전국문화기반시설 자료를 보길 바란다.

문화체육관광부(2024). 2024년 전국문화기반시설 총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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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여주시립폰박물관, 짜장면박물관, 진안가위박물관, 둘리뮤지엄 (출처: 각 박물관 홈페이지)


공감과 이해의 시작

동남아시아는 경제적으로 빈곤한 나라, 게으르고 무질서한 사람들이라는 편견이 있고, 이슬람 국가에는 인권 탄압과 배타적 문화라는 편견이 분명히 존재한다. 물론 내 얘기다. 과거에 그랬고 지금은 많이 깨우치고 있다. 여행을 통해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책으로 배운 덕도 있지만, 내 경우에는 박물관이 그 계기가 되었다.

예를 들어,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를 가면 뉴스를 통해 보는 중동의 부정적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만나게 된다. 전혀 배타적이지 않은 것은 물론, 한 사회 안에서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 등 여러 종교들이 너무나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다. 무슬림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모스크에 들어가 구경도 할 수 있고, 그들이 할랄음식을 먹듯이 그들도 타인의 식문화를 존중한다. 이슬람 문화를 다루는 박물관(예, 말레이시아의 이슬람예술박물관 Islamic Arts Museum Malaysia)에 가면, 이슬람은 단순 종교가 아닌 그들의 삶 그 자체였을을 느낄 수 있다.

역사는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창이다. 박물관은 그 역사를 현재의 방식으로 실체화한 곳이고, 우리는 그 안에서 그들 사회의 기억과 자취, 삶의 방식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즉 우리와 다른 국가, 인종, 종교, 문화를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곳이 바로 박물관이다. 동남아시아 역사를 원시 부족국가에서 식민지배를 거쳐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고 단순하게 인식하고 있다면, 꼭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국립박물관 한 곳을 가보시길 추천드린다.


harmony street.jpg <Harmony Street in Melaka> 작은 골목 안에 힌두교 사원, 이슬람 모스크, 불교 및 도교 사원이 조화롭게 존재한다.


다양성에 대한 존중

다름의 차이를 틀림으로 보지 않고, 다양한 삶의 방식이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곳 또한 박물관이다.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의 페라나칸(Peranakan) 문화는 공존의 대표적인 예시이다. 예를 들어, 말라카의 Baba & Nyonya Heritage Museum, 싱가포르의 Peranakan Museum, 인도네시아의 Chinese Peranakan Library Museum 등에 가면, 중국인 이민자와 현지인이 혼인해 낳은 후손들, 즉 페라나칸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생생히 볼 수 있다. 식민지배 시기까지 겹쳐 중국, 유럽, 현지 문화가 혼합된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스페인인 또는 포르투갈인과 라틴아메리카 현지인의 혼혈을 말하는 메스티소(Mestizo)의 문화도 마찬가지이다. 호주에 가면 많은 박물관에서 애버리진(Aborigine: 호주 원주민)의 예술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의무적으로 전시해야 하는 규정이 있나 싶을 정도로 대부분의 박물관에서 애버리진의 작품을 볼 수 있다. 지금이라도 아픈 과거를 딛고 호주 대륙에서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를 이해하려는 노력의 일환일 것이다.

다른 이들의 과거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들의 현재도 존중하기 어렵다. 지금의 문화와 생활방식에는 분명한 배경이 존재하고, 그 배경과 현재를 잇는 맥락을 파악해야 현재를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카스트 제도의 잔재가 여전히 남은 인도, 왕실 비판이 금지된 태국, 유대교 종교국가 이스라엘, 관광객 제한 정책을 유지하고 가이드 동행이 필수인 부탄. 겉에서만 보면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들의 역사와 문화적 히스토리를 알면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 적지 않을 것이다.


페라나칸 뮤지엄.jpg Peranakan Museum in Singapore (출처: Visit Singapore)
애버리진 전시물.jpg <Museum of Contemporary Art Australia> 내 애버리진 예술작품 (출처: MCA 홈페이지)


이런 이유 외에도 장점은 또 있다. 무엇보다 더위와 추위를 피하기에도 좋다. 체험하고 즐길거리가 많아 아이와 함께 가기에도 좋고, 훌륭한 음식점과 카페를 가진 곳도 많다. 예쁜 굿즈를 판매하는 기념품샵도 있다. 국립박물관문화재단에 따르면, 2024년 국내 박물관 굿즈의 판매량이 200억 원을 넘어섰다고 한다.


빈미술사박물관 카페.jpg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Kunsthistorisches Museum> 내 카페 (출처: 박물관 홈페이지)
반가사유상 미니어처 굿즈.jpg 반가사유상 미니어처 (출처: 국립박물관문화재단 홈페이지)




현재와 과거가 대화하는 공간

우리는 박물관에서 세 단계의 이해과정을 경험할 수 있다. 하나, 과거를 알게 되는 단계. 둘, 현재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단계. 셋, 과거와 현재가 연결되는 단계이다. ① 호주의 애버리진이 과거에 어떤 참상을 겪었는지를 알아야 ② 최근까지도 외면된 그들의 현재를 이해할 수 있게 되고, ③ 호주의 박물관들마다 왜 그들의 예술작품을 빠짐 없이 전시하고 있는지도 공감할 수 있다. 역사학자 E.H.Carr가 정의한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를 실체화한 공간이 박물관인 것이다.

이렇게 나 스스로 박물관을 정의하고 방문하는 목적을 분명히 해 두면, 내가 박물관에 갔을 때마다 그곳이 말하고자 하는 과거와 현재의 연결지점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을까? 작은 것이라도 알게 되는 점을 여기에 차곡차곡 담아가는 과정이 내 인생에서 하나의 즐거움이 되길 바라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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