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 [일본] 스미다 호쿠사이 미술관(すみだ北斎美術館)
일본 미술 우키요에의 대표적 작품
'가나가와 앞바다 파도 아래'가 왜 유명한지 알 수 있는 곳
<스미다 호쿠사이 미술관>
일본의 미술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작품이 있다. 거친 파도가 강렬해 보이는 작품이다. 언뜻 보면 웅장한 파도만 눈에 띄어 배가 있다는 사실과 배경에 산이 있다는 사실은 나중에서야 인식하게 되기도 한다. 일본의 수많은 기념품과 일본을 상징하는 굿즈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왜 이 작품이 일본을 대변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도쿄에 방문한 김에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 이 작품의 작가인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 かつしか ほくさい)를 기념하는 미술관이 있어 찾아갔다. 회화가 아닌 목판화라는 것도, 이러한 작품을 우키요에(浮世絵)라 칭하는 것도, 근대 서양미술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자포니즘(Japonisme)의 대표적인 작가라는 것도 미술관에 방문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도쿄 스미다구에 위치한 스미다 호쿠사이 미술관(すみだ北斎美術館)에 다녀온 기록을 남겨본다. 다만 일본의 대부분의 박물관이 그렇듯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이미지를 직접 남기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 일본 에도시대 도시민의 소비와 유통 구조 속에서 우키요에는 대중매체로 기능했고, 가쓰시카 호쿠사이는 그 한계를 예술적으로 확장한 인물이다.
✔️ 명칭: 스미다 호쿠사이 미술관 (일본어: すみだ北斎美術館, 영어: The Sumida Hokusai Museum)
✔️ 홈페이지: https://hokusai-museum.jp/
✔️ 지역: 일본 도쿄시 스미다구
✔️ 위치: https://maps.app.goo.gl/im1iwkRiJCS5TryS8
우키요에는 일본의 전통 미술이라기보다는 에도(江戸) 시대의 시각매체로 보는 편이 정확하다. 에도 막부가 설립된 이후, 에도(현재의 도쿄)는 큰 규모의 도시로 발전했다. 여전히 무사계급이 정치적 주도권을 가졌지만, 경제규모가 커진 만큼 초닌(町人)이라는 상공업 종사자 계층이 권력자와 농민 사이에서 중간 계층으로 자리 잡으며 성장하고 있었다. 신분상 그들은 권력에 접근할 수는 없었지만, 경제력을 바탕으로 가부키(歌舞伎)나 우키요에와 같은 문화를 발전시키는 주요 계층이 되었다. 상공업 계층이었던 만큼 고가의 예술성을 갖춘 작품을 소비하기보다는, 당대에 유행하는 인물(가부키 배우, 유곽의 유녀, 스모선수, 소설 속 인물 등)이나 후지산 같은 유명한 풍경과 명소 등 대중에게 쉽게 수용되는 소재를 소비하였고, 이 소비 수요를 충족하는 가장 효율적인 미술 형식이 바로 우키요에였다.
우키요에는 원래 불교용어로 '괴롭고 허무한 현세'를 의미하는 우키요(憂き世)에서 유래되었다. 그러나 에도시대에 들어 발음은 같지만 의미는 정반대인 우키요(浮世)로 바뀌게 된다. 에도시대 도시민의 현재의 삶과 욕망을 나타내는 유흥, 유행, 일상, 여행 등을 소재로 다루면서 '덧없음을 알기에 지금의 즐거움을 누리는 세상'이라는 의미로 전환된 것이다. 이러한 도시민의 욕구를 맞추기 위해서는 대량 생산을 통해 빠르게 유통될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목판화인 우키요에가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이다. 단일 원본을 전제로 하는 회화는 가격과 접근성 측면에서 도시민의 니즈를 충족할 수 없었던 반면, 동일 이미지를 수백 장 인쇄해 다수에게 동일하게 전달할 수 있었던 우키요에는 유행의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하며 대중 매체로써 기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가부키 배우 그림은 오늘날의 연예인 포스터와 같은 기능을 했고, 명소의 그림은 여행 정보로써, 유곽을 다룬 그림은 홍보 전단지로써 역할을 했다. 아래 세 가지 그림을 대표적으로 소개한다.
가부키 배우: 도슈사이 샤라쿠(東洲斎写楽), <오타니 오니지 3세의 에도베에 역(大谷鬼次の江戸兵衛)>, 1794
기리후리 폭포: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 <구로카미산 기리후리 폭포(下野黒髪山霧降の滝)>, 1832
유곽의 여인: 기타가와 우타마로(喜多川歌麿), <당대의 세 미인(当時三美人)>, 1793
우키요에를 제작방식으로 나누면, 비단이나 종이에 직접 그린 육필화와 목판을 조각하고 인쇄한 판화로 구분할 수 있지만, 육필화는 고가에 팔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도시민들이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판화로 만든 우키요에가 주로 제작, 유통되었다. 이에 우키요에의 뜻은 주로 판화로 제작한 작품을 의미하는 것으로 자리 잡았다.
판화 자체는 물론 에도시대 이전부터 있었다. 우리나라도 신라시대 <무구정광대다라니경>, 고려시대 <팔만대장경>을 제작했듯이, 일본도 헤이안(平安) 시대(794-1192)부터 불교의 경전을 대량으로 제작해 배포하기 위해 목판 기술이 발달해 있었다. 초기 우키요에는 단색으로 제작되었으나, 에도시대 중기부터 그림 달력을 교환하는 모임이 당시 애호가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면서 달력 디자인을 놓고 경쟁이 벌어졌고, 이는 채색 목판화 제작 기술의 발전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우키요에가 본격적으로 성장하고 대중들의 사랑을 받게 된 계기이다. 다색 판화는 비단처럼 화려하다는 의미에서 니시키에(錦絵, にしきえ)라 불리기도 했다.
우키요에 제작은 4가지로 분업이 이루어진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고, 조각가가 그림을 목판에 새긴다. 인쇄공이 채색의 수만큼 인쇄해 완성하고, 출판업자가 시중에 유통한다. 이 과정에서 중심은 출판업자였다. 우키요에는 예술작품이 아닌 대중매체였기 때문이다. 그림의 주제 선정, 제작 수량, 가격 책정 모두 시장 반응에 따랐기 때문에, 이를 결정하는 기획자는 주로 출판업자였던 것이다. 이에 출판업자와 화가는 역사적으로 이름을 남긴 사례가 많지만, 조각가와 인쇄공은 기능공으로서 이름을 남긴 사례가 거의 없다.
다색을 사용한 니시키에라도 가격은 비싸지 않게 거래되었다. 이 미술관에 따르면, 1805년 배우 니시키에 두 점이 16몬(もん)에, 풍경 니시키에는 20몬에 팔렸다고 한다. 도쿠가와 막부 말기에도 대부분 25~30몬 사이에 유통되었고, 당시 메밀국수 한 그릇이 약 16몬에 팔렸다고 하니 현재 화폐가치로는 약 1,000엔 정도가 아닐까 싶다.
일반적인 우키요에는 저렴하게 거래되었지만, 출판사에서 발행하는 상업적 작품이 아닌 개인적으로 의뢰하여 제작한 우키요에인 스리모노는 값비싸게 거래되기도 하였다. 판매 목적이 아닌, 기념이나 증정, 교환의 목적이었기 때문에 아주 소량만 제작되었고, 고급 화지의 사용, 훨씬 더 다양한 채색, 운모(雲母, 빛을 받으면 반짝이는 광물 분말)를 이용한 표면 처리 등을 통해 인쇄 품질을 더 높였기 때문이다. 스리모노는 대중매체로 기능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양과 맥락을 공유한 사람들만 이해 가능한 은유, 언어유희, 암호화된 상징이 다수 포함되었다고 한다. 니시키에의 발전 계기가 된 그림 달력 또한 스리모노의 한 주제였다. 또한 일본 고전 시가인 와카(和歌), 와카의 형식에 풍자와 언어유희를 가미한 교카(狂歌), 중국 고전 문학의 형식을 차용한 한시(漢詩)를 함께 담는 경우가 많았다. 단순히 저렴하게 대량으로 유통된 대중매체 또는 미술작품으로 보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스리모노의 존재 때문이다. 스리모노는 우키요에가 얼마나 더 정교해지고, 어디까지 예술성을 높일 수 있는지, 어떻게 기술이 발전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스리모노 중 세 가지 작품을 소개한다. 다만 스리모노 작품들은 개인적 거래 목적이라 작가가 명명한 공식 명칭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미술관이나 연구기관에서 주로 사용되는 명칭을 차용해 기재했음을 밝힌다.
기타가와 우타마로(喜多川歌麿), <여인과 여우(狐と女)>, 1790년대 후반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 <파도 위의 승려(波上の僧)>, 1820년대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広重), <회중시계와 담배 주머니(懐中時計と煙草入)>, 1830년대 초반
<가나가와 앞바다 파도 아래>라는 작품이 일본을 상징하듯이, 가쓰시카 호쿠사이(1760~1849)는 우키요에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서양 미술사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예술가이다. 도쿄 스미다구는 그의 고향이자 그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곳으로, 스미다구는 그를 기념하기 위해 2016년 미술관을 개관하였다.
호쿠사이는 90년에 달하는 생애에서 90번 이상 거처를 옮긴 사실, 30회 이상 호(号)를 바꾼 사실 등의 기행으로도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당시 시대적 배경을 생각해 보면, 안정적 후원 없이 출판 의뢰에 경제적으로 의존한 화가에게 이동은 필수적일 수밖에 없었으며, 풍경을 주로 그린 호쿠사이에게 이사는 개인적 탐구의 결과이기도 했다. 호를 바꾼 것 또한 출판업자, 그림의 주제, 사제 관계에 따라 이름을 달리 사용하는 것은 당시 드문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시장과의 관계 속에서 자연스러운 선택일 뿐이었다.
그는 90세까지 붓을 놓지 않았고, 판화, 회화, 도안, 삽화 등 수천 점에 이르는 작품을 남겼다. 대표작은 연작 <후지산 36경(富嶽三十六景)>(1830~1832)으로 <가나가와 앞바다 파도 아래>도 이 연작 중의 하나이다. 이 연작은 다색 목판화인 니시키에로, 36점의 출판 이후 인기가 높아져 추가 10점을 더했고 총 46점으로 완성되었다.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에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동일 대상(후지산)을 다른 구도이자 다른 시점(계절, 날씨, 시간대)에 그렸는데, 이전까지는 단일 자연물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연작의 사례가 없었다. 클로드 모네가 <수련>과 <루앙 대성당> 등을 빛의 변화에 집중하며 연작했던 시기보다 최소한 60년 이전이다. 둘째, 이 연작의 핵심은 후지산을 대상으로 그렸다는 것이 아니라, 후지산을 관계 속의 존재로 설정했다는 점이다. 주인공일 때도 있지만 멀리 배경으로 밀려날 때도 있다. 숭배의 대상이거나 자연 속의 구조물이 되기도 하고,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의 배경이기도 하며, 이동길의 랜드마크가 되기도 한다. 셋째, 시각매체 기능의 우키요에가 특정 장소를 기록하는 목적이었다면, 호쿠사이의 <후지산 36경>은 자연을 매개로 한 시각체계의 실험이라는 목적으로 우키요에의 성격을 확장시켰다.
호쿠사이는 육필화도 다수 그렸다. 미술관에는 전체 길이 7m가 넘는 육필화 <스미다강 양안 경색도권(隅田川両岸景色図巻)>의 복제본이 전시되어 있는데, 료고쿠(両国) 다리에서 아즈마(吾妻) 다리까지 스미다(隅田) 강 양안의 풍경과 유곽에서의 유흥 장면, 수면의 비친 다리와 배, 누각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남녀 등 세밀한 붓터치로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은 1902년 파리로 건너가 경매에 부쳐진 뒤 오랫동안 행방이 묘연했으나, 약 110년 만에 발견되었고 본 미술관에서 취득해 호쿠사이의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완벽을 추구했던 호쿠사이의 예술가로서의 철학은 그의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호쿠사이가 75세 때 출판한 그림 참고서 <후지산 백경(富嶽百景)>의 첫 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70세 이전까지의 그림은 보잘것없는 것으로 73세가 되어 비로소 동식물의 골격과 출생에 대해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80세에는 더욱 성장하여 90세에 그림에 대해 깊은 뜻을 규명하고, 100세에 신묘의 영역에 도달하여 백 수십 세가 되면 한 점 한 선이 살아있을 것이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89세에도 호쿠사이는 “내게 5년이라는 생명이 더 주어진다면 진정한 화공이 되었을 것이다.”는 말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