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 [일본] 스미다 호쿠사이 미술관(すみだ北斎美術館)
유럽에 자포니즘(Japonisme) 열풍을 일으킨 일본미술 우키요에,
고흐, 모네, 드가 등 서양 회화의 변화를 이끌어낸 곳
<스미다 호쿠사이 미술관>
스미다 호쿠사이 미술관(すみだ北斎美術館)을 둘러보면서 서양인 관객이 참 많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도 외국인 관람객이 많긴 하지만, 이 미술관은 일본인 절반, 서양인 절반 정도의 관객 분포로 보였다. 자포니즘(Japonisme)이라 칭하는 미술의 조류가 서양 미술사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지 아닐까 싶었다. 고흐, 모네, 드가와 같은 세계적인 화가들이 일본의 화풍에서 영향을 받고, 우키요에 작품들까지 수집했다고 하니 관광객들도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 같다.
이 미술관은 호쿠사이의 생애와 우키요에 자체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서양 미술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까지는 깊이 있게 다루고 있지 않다. 하지만 당시 서양의 미술계에서 가장 알려진 인물 중에 하나가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 かつしか ほくさい)고, 자포니즘의 형성 배경에 우키요에가 있기 때문에 이 미술관 방문을 계기로 일본이 서양 회화에 끼친 영향력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 인상파가 바란 대안적 회화 구조를 실천하고 있던 우키요에는 서양 회화를 구조적으로 흔들면서 자포니즘(Japonisme)이란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냈다.
✔️ 명칭: 스미다 호쿠사이 미술관 (すみだ北斎美術館, The Sumida Hokusai Museum)
✔️ 홈페이지: https://hokusai-museum.jp/
✔️ 지역: 일본 도쿄시 스미다구
✔️ 위치: https://maps.app.goo.gl/im1iwkRiJCS5TryS8
스미다 호쿠사이 박물관에서 확인한 우키요에는 예술이라기보다 대량 소비되는 시각 매체에 가까웠다. 에도 시대 후기 우키요에는 목판 인쇄를 통해 반복 생산되었고, 가부키 배우 초상, 미인화, 명소와 풍경 등 동시대 도시 문화의 기록물로 유통되었다. 이 점은 이후 우키요에가 서양으로 유입되는 경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특성이다.
1854년 일본은 강제로 미국과 미일화친조약(美日和親條約)을 체결한다. 200여 년간의 쇄국 정책을 끝내고 시모다(下田)와 하코다테(函館)를 개항한 조약이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서구 무역망에 편입되었고, 일본의 도자기, 칠기와 같은 공예품도 대량으로 유럽에 수출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우키요에 인쇄물이 공예품의 포장지와 완충재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유럽에 처음 알려진 일본의 그림은 바로 이 포장지와 완충재였다. 알려지게 된 계기가 작품 자체의 예술성이 아니었다는 점은 놀라운 사실이다.
1856년 프랑스의 판화가 펠릭스 브라크몽(Félix Bracquemond)은 인쇄업자의 작업실에서 도자기 상자를 풀던 중 완충재로 사용된 종이가 일반 종이가 아닌 정교한 그림이 그려진 <호쿠사이 만화(北斎漫画)>의 일부임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는다. 일본에서 우키요에는 대량 생산되는 매체라 포장지나 완충재로 쓰일 만큼 흔했지만, 서양 미술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파격적인 구도와 화풍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호쿠사이 만화>를 직접 구해 동료 화가들에게 소개했고, 이것이 인상파 화가들에게까지 전파된 것이다. 그 또한 영향을 받아 <호쿠사이 만화>에 등장하는 새, 물고기, 곤충 등 동식물 모티프를 활용하여 식기세트 <루소 서비스(Service Rousseau)>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우키요에의 전파 과정을 얘기하기에는 너무 극적인 면만 강조하는 것 같다. 우키요에가 마치 폐지처럼 사용된 것으로 느낄 수 있지만, 실제 우키요에는 일본 내부에서도 감상과 수집의 대상이었고, 유럽에 들어간 작품도 상업 거래를 통한 것이 많다고 한다. 즉 브라크몽의 이야기는 사실이기도 하지만 유입의 드라마틱함을 강조하기 위한 측면이 크다. 우키요에를 예술품으로만 취급했다기보다는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인쇄물로도 취급하였기 때문에 화가들의 작업실에 더 빠르게 침투할 수 있었던 것으로 해석하면 된다. 그리고,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는 일본이 국가관을 만들면서까지 참가하여 그들의 공예, 회화, 판화를 노출시켰고, 유럽으로의 유입 속도를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우키요에 자체가 대단한 예술품이었기 때문에 충격을 받은 것은 아니다. 기존 회화 규칙을 깨뜨릴 수 있는 아이디어이자 도구였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서양의 아카데믹한 회화에서는 단일 소실점을 통해 3차원의 깊이를 구현하는 것을 원칙이라 생각했으나, 우키요에는 대담하게 평면적이었다. 또한 서양은 명암과 빛, 그림자를 이용해 입체감을 강조하였으나 우키요에는 명암 없이 선명한 윤곽선과 단조롭고 강렬한 색면을 사용하였으며, 서양은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중앙에 배치하는 안정적 구도 중심이었으나 우키요에는 피사체의 일부를 과감하게 잘라내기도 하고 비대칭적인 구도가 적지 않았다.
서양에서도 고전회화의 스타일에서 벗어나 인상파가 태동하던 시기였기에 일본의 화풍은 더욱 큰 충격일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우키요에가 들어오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인상파 화가들을 중심으로 일본의 화풍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1860년대 대표적인 세 작품을 소개해 본다. 가장 초기 사례 중 하나인 제임스 휘슬러(James Whistler)의 작품 <Caprice in Purple and Gold: The Golden Screen(1864)>을 보면, 기모노를 입은 여성이 일본의 우키요에 작가인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広重)의 작품을 감상하는 모습을 담았는데, 당시 화가가 수집했던 일본 미술품들을 직접적으로 노출한 것이다. 다음으로, 에드가 드가(Edgar Degas)의 <Woman Seated beside a Vase of Flowers(1865)>를 보면,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중앙이 아닌 가장자리에 배치하는 비대칭적 구도와 인물의 일부를 과감히 절단하는 기법을 사용하였다.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는 <Portrait d'Émile Zola(1868)>에서 그림의 배경에 일본식 병풍과 우키요에를 그렸는데, 이는 당시 프랑스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일본 미술에 대한 관심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당대의 화가들이 일본의 화풍에 큰 영향을 받는 흐름이 지속되자 1872년 프랑스의 비평가 필리프 뷔르티(Philippe Burty)는 문예지 <La Renaissance littéraire et artistique> 5-6월호에서 자포니즘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하면서 동명의 글을 발표한다. 예술의 사조는 보통 후대에 규정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반해, 자포니즘은 동시대적으로 명명되었을 만큼 당대 화가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서양에 소개된 지 10년 남짓한 시간이 지났을 뿐이었다. 그는 일본 미술이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회화, 판화, 장식미술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독자적 시각 체계라 규정하며 자포니즘이라 명명했다.
고흐는 우키요에를 대량 수집하며 학습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수집했던 우키요에를 그대로 캔버스에 옮기면서 전통적인 명암과 원근법 대신 강렬한 색채 대비와 평면적인 구도를 실험했다. 우키요에와 동일하게 윤곽선을 강조하며 명암 중심의 형태 인식을 버렸고, 화면 가장자리에 일본 문자를 삽입해 판화의 프레임 자체를 회화 안으로 끌어들였다. 일본의 방식을 그대로 따라했다기보다는 일본의 판화 규칙을 유화 규칙으로 번역한 사례라 볼 수 있다. 실제로 1888년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흐는 본인의 작품이 어느 정도 일본의 미술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밝히기도 했다. 고흐가 수집한 우키요에 작품 목록은 반 고흐 박물관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www.vangoghmuseum.nl/en/japanese-prints
모네는 지베르니(Giverny) 자택에서 생의 절반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자택은 현재 모네의 미술관처럼 운영되고 있는데, 현재도 그가 수집한 다수의 우키요에를 전시하고 있다. 특정 시기에 장식용으로 전시한 것이 아닌 침실, 주방, 복도 등 생활 동선 전체에 걸쳐 전시하였고 수십 년간 유지되었다고 한다.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와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広重)의 작품도 그의 컬렉션에 포함되어 있다. 일본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작품 중 일본식 기모노를 입은 아내 카미유 모네(Camille Monet)를 그린 <La Japonaise>(1876)가 유명하지만, 이는 일본의 의상과 문양이 그림에 반영되었을 뿐 여전히 서양 회화의 구도와 방식을 택하고 있어 표면적 영향력에 그치는 작품이다.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작품은 모네의 대표작인 <수련(Les Nymphéas)> 연작에서 나타난다. 호쿠사이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후가쿠 36경(冨嶽三十六景)>의 가장 특징적인 점은 후지산이란 대상은 동일하지만 다른 시점과 조건이 작품의 주제가 되는 방식이다. 이는 서양 회화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접근 방식이었는데, 모네는 이를 본인 회화의 핵심 전략으로 택한 것이다. 모네는 고정된 형태나 색채 대신,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에 따라 대상이 보이는 순간적인 인상과 찰나의 분위기를 캔버스에 포착해 내는 화가로 알려져 있는데, 바로 이 방식이 우키요에로부터, 일본 화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결과이다. 즉 동일 대상을 반복 관찰하는 연작 구조, 자연을 장면으로써 바라보기보다는 시각 조건으로 다루는 모네의 방식이 자포니즘의 영향력이었다.
드가는 자포니즘의 영향을 가장 구조적으로 흡수한 화가 중 한 명이다. 일본식 소재가 아닌 우키요에의 화면 구성 논리를 그의 회화에 이식했기 때문이다. 드가의 대표적 작품 중 하나인 <무대 위의 발레 리허설(Répétition d'un ballet sur la scène)>(1874)를 보면, 인물의 머리와 팔이 작품에서 잘리기도 하고, 작품 중심에 위치한 인물보다 주변 인물이 강조되어 시선을 분산시키기도 한다. <바에서 연습하는 무용수들(Danseuses à la barre)>(1877) 또한 하단에 빈 공간을 두고 상단에 인물을 위치시킨다. 우키요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대칭적인 인물 배치와 구도이다.
또한 전통적인 눈높이 시점에서 벗어나 위에서 내려다본 시점으로 그린 <욕조(Le Tub)> 연작(1886)도 우키요에의 영향이다. 비대칭적인 구도가 적용되어 순간적이고 역동적인 느낌을 강조하고 있으며, 서양 회화에서는 흔치 않았던 윤곽선을 사용하여 형태를 구분한 방식도 적용되어 있다. 이는 미인화로 유명한 기타가와 우타마로(喜多川歌麿)의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였다.
서양의 전통 회화 방식과 전혀 다른 방식의 우키요에가 당시 서양 화가들에게 혁신적으로 다가왔던 점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하지만 유럽은 이미 오래전부터 중국, 이슬람 지역 등의 다양한 비서구적 미술을 접해왔다. 이 역시 충분히 이국적이었음에도 회화의 구조 자체를 바꾸는 영향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취향의 다양성 정도였다. 그렇다면 왜 우키요에는 강한 영향력을 끼쳤고, 다른 국가의 미술은 영향력이 미미했을까라는 질문이 남는다.
우키요에가 유럽으로 전파된 시기는 인상파가 등장하던 시기와 정확하게 겹친다. 당시 유럽의 아카데미 회화는 여전히 단일 소실점에 기반한 원근법, 명암을 통한 입체감, 중심 구도와 완결된 화면, 역사·신화·영웅 서사 중심의 주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19세기 중반 이후 도시화, 산업화, 사진의 등장 속에서 신진 화가들은 이 규칙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 경험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즉 전통 회화 규칙에 대한 구조적 거부가 태동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욕망이 꿈틀대던 시기에 화가들은 우키요에를 접했고, 그들이 문제 삼고 있던 지점을 격파한 작품이 바로 우키요에였던 것이다. 원근감도, 입체감도 없이 표현한 공간 구성, 인물과 사물이 과감히 잘리는 크로핑(Cropping), 대상이 중심에 위치하지 않아도 되는 비대칭적인 구도, 일상과 순간을 주제로 삼는 자유로움 등 답답한 규칙이 해제되어 있었다. 당시 인상파 화가들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외부에서 증명해 주는 사례였고, 내부에서 이미 꿈틀거리고 있던 변화를 가속시킨 촉매제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게 보다 정확한 자포니즘의 역할일 것이다.
만약 우키요에가 18세기에 유입되었다면 같은 영향력을 미쳤을까? 당시 유럽 미술은 굳건하게 아카데믹한 회화 체계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과 이슬람 미술처럼 다양한 취향 중 하나로 소비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인상파가 전통 회화에 반기를 들던 시점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자포니즘을 제대로 읽어낼 수 없다. 기술적 변화 자체보다 인간의 욕망을 근간에 두고 기술적 변화가 더해져야 실체적인 변화가 작동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