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토와 메이지 유신이 탄생시킨 공간, 메이지 신궁

#033. [일본] 메이지 신궁(明治神宮)

by Muse u mad
도쿄 도심의 산책로이자,
일본인의 토속신앙과 메이지 유신의 정체성을 느껴볼 수 있는 곳
<메이지 신궁>


한 해의 마지막 날 방문한 메이지 신궁(明治神宮)에는 수많은 현지인들과 관광차 온 외국인들까지 너무나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시작을 기원하는 종교적∙문화적 의례를 위해 신사(神社)에 방문하는 일본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또한 신사 참배 후에는 한 해의 운세를 점치는 오미쿠지(おみくじ)를 뽑거나, 액운을 막거나 복을 부르기 위한 부적 오마모리(おまもり)나 엔기모노(えんぎもの)를 구입한다.

(좌) 참배 중인 사람들 / (중) 오미쿠지를 뽑고 있는 모습 / (우) 엔기모노를 구입하고 있는 사람들


물론 일본도 젊은 세대의 신사 참배나 토속신앙 신토(神道)를 종교로써 믿는 비율이 점차 적어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일찍이 산업화한 일본에서 여전히 토속신앙이 굳건하게 국가 종교 중 하나로써 기능하는 것도 의아했고, 메이지 덴노(明治天皇)를 신으로 추앙하고 있는 것도, 신사가 아닌 신궁으로 칭하는 것도 궁금했다. 메이지 신궁 방문을 계기로 궁금증을 풀어보고자 한다. 참고로, 천황이란 표현은 정치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해 일본어 발음 그대로 덴노라 칭한다.



한 줄 요약

✔️ 메이지 신궁은 일본 토속신앙 신토와 메이지 유신 이후의 국가 이념이 결합된 공간으로, 근대 일본이 자신을 어떻게 정당화하고 기억하고자 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소다.


유적지 개요

✔️ 명칭: 메이지 신궁(明治神宮, Meiji Jingu)

✔️ 홈페이지: https://www.meijijingu.or.jp/

✔️ 지역: 일본 도쿄시 시부야구

✔️ 위치: https://maps.app.goo.gl/8c5SGfWsRAPZok4g6



일본의 토속신앙 신토(神道)

근대화, 산업화, 민주화가 완전히 정착된 국가들 중 종교적으로 가장 특이한 국가를 꼽는다면 일본이 아닐까 싶다. 일본 문화청의 종교연감(2023)에 따르면, 토속신앙인 신토계가 48.6%로 가장 많고, 불교가 46.4%를 차지한다. 이슬람교나 힌두교, 유대교 등은 당연히 극소수에 불과하고, 기독교마저도 1.1%에 그친다. 그러나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의 2020년 동아시아 종교분포 분석 보고서를 보면, 일본 국민의 절반 이상(57%)이 무교라 답했다. 일본의 종교연감과 퓨 리서치 센터의 결과가 이렇게 다른 이유가 무엇일까?

일본에 등록된 신토계 종교법인은 무려 8만 4천여 개로, 불교 사찰이나 기독교 시설의 수를 훨씬 상회하기 때문에, 신토가 종교적으로 큰 지위를 점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신토를 기독교, 불교와 같이 창시자, 경전, 교리가 있는 명확한 종교로 보면, 일본의 종교문화를 해석할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마을 공동체를 중심으로 장승이나 서낭당을 세우면서 복을 기원하고 액운을 물리치고자 했던 민속신앙과 차라리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신토는 우리가 관념적으로 알고 있는 종교라기보다는, 자연·조상·지역 공동체의 기억을 관리해 온 의례 체계에 가깝다. 신 또한 초월적 인격신에 한정되지 않고, 역사적 기여가 큰 사람은 물론, 모든 자연물과 동식물, 심지어 특정 기능의 물건까지도 신이 될 수 있다. 일본 문화청에서도 신토의 신을 '다양하고 고정되지 않은 존재'로 규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교토의 미카미 신사(御髪神社)는 머리카락 신을 모시고 있어 탈모 방지와 미용사 자격시험 합격을 기원하는 곳이고, 쿠루마자키 신사(車折神社)는 연예와 예술의 신을 모셔 연예인들이 인기를 얻기 위해 방문하는 곳이다. 이나자와의 메구스리노키 신사(目薬の木神社)는 안구의 신을 모셔 시력 회복과 안구 건강을 기원하는 곳이다. 이처럼 해당 지역에서 조상이 누구였는지, 역사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지역적 특성이 어떠한지 등에 따라 다채로운 신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일본의 신사는 중앙집중적 관리 체계 하의 종교가 아닌, 지역 단위로 축적된 기억과 의례가 누적되어 발현된 결과물로 보는 게 타당하다.

이처럼 신토는 일본인의 일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본인의 종교적 정체성이 신토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더라도 연말연시나 기원할 일이 있을 때 부담 없이 방문한다. 그래서 기복신앙으로써 신토를 믿는다는 사람은 일본인의 절반에 가깝지만, 종교적 정체성으로는 무교라 답변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불교 사찰에 부담 없이 방문해 내가 원하는 바를 기원하지만, 불교를 믿느냐는 질문에는 아니라고 답하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일본의 신토와 신사의 기능은 이렇게 바라봐야 한다.

메이지 신사를 방문하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을 기다리는 사람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과 상징적 존재의 덴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메이지 신사는 메이지 덴노와 배우자인 쇼켄 고타이고(昭憲皇太后)를 모신 곳이다. 메이지 덴노는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며 근대화를 추진했고, 이를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기반을 만든 인물이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반갑지 않지만, 그와 배우자를 왜 신으로 추앙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메이지 덴노 시기의 시대적 상황과 그의 역할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

19세기 중반 에도 막부(江戸幕府)는 최고 통치자 쇼군(将軍)과 수많은 번(藩)을 다이묘(大名)들이 느슨하게 연결된 막번(幕藩) 체제였다. 많은 수의 사무라이들을 거느리고 있는 다이묘는 봉건 영주의 지위를 갖고 있었다. 이런 정치 체제에 균열을 낸 것은 1858년 미국과의 개항을 승인한 불평등조약 '미일수호통상조약'이었다. 서양과의 격차는 분명했고 잘못하면 일본도 식민지가 될 수 있다는 위기감에 번 중심의 분권적 체제는 국가적 대응에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심지어 덴노의 칙허 없이 굴욕적인 조약을 체결했다는 사실에 사쓰마번(薩摩藩)과 조슈번(長州藩)을 중심으로 한 젊은 하급 사무라이들 사이에서는 존황양이(尊皇攘夷) 사상, 즉 덴노를 받들고(존황) 외세를 배격(양이)하자는 사상이 지지를 받았다. 덴노가 상징적 존재에 불과했더라도 그는 분명 개항에 부정적 의사를 표현했기 때문에, 덴노를 거치지 않고 외교 조약을 체결한 것은 막부 체제를 공격하기에 아주 적합한 정치적 수단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분권형인 막번 체제를 무너뜨리고 서구식 중앙집권제 국가를 구축하고 싶었고 그 중앙에 덴노를 올려놓고자 하였다. 결국 마지막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는 정권을 1867년 즉위한 메이지 덴노에게 바치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을 실시하여 덴노 중심의 정치 체제가 시작된다. 이후 덴노는 교토에서 에도로 거처를 옮기고 도쿄(東京)라 새롭게 명명한다. 우리가 아는 도쿄의 시작도 메이지 유신과 함께였다.

막번.png 에도 막부 말기 번 지도. 메이지 유신의 핵심 세력인 조슈번(현재 야마구치현 일대)과 사쓰마번(현재 가고시마현 일대) (출처: https://tonbiwing.com/map)


1868년(메이지 1년) 에도 막부가 해체되고 왕정복고가 이루어지면서 메이지 유신이 시작된다. 다이묘들이 소유한 토지와 백성을 덴노에게 반환하는 판적봉환(版籍奉還, 1869), 모든 번을 폐지하고 현(縣) 체제로 대체하는 폐번치현(廢藩置縣, 1871)을 실시했다. 280여 개에 달하던 번을 72개의 현으로 축소하고, 새로운 정부는 각각의 현에 현지사를 파견했다. 쇼군과 다이묘의 징세권을 덴노가 가져왔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세수가 근대화의 발판이 되었고, 메이지 유신을 상징하는 조치였다. 1889년 대일본제국헌법 공포하면서 덴노를 정점으로 하는 입헌군주제의 근대 국가가 확립되었고, 짧은 기간 내에 근대화에 성공하면서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타이완을 식민지로 삼으면서 본격적인 군국주의 국가로 나아가게 된다.

메이지 유신이라는 이름 때문에, 그리고 덴노 중심의 중앙집권제 및 입헌군주제를 이루었기 때문에 메이지 덴노가 메이지 유신 자체를 이끌었다고 오해하기 쉽다. 하지만 그는 메이지 유신을 이끈 설계자나 정책 입안자는 아니었다. 도쿠가와 막부에서 다른 가문의 막부로 이동했다면 막번 체제가 해체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백성들도 쿠데타라 생각할 수밖에 없지만, 덴노로 권력이 이동하는 것은 충분한 명분과 정당성을 갖출 수 있었기 때문에 덴노의 상징성이 활용된 것이다. 초대 진무(神武) 덴노 이래 혈통이 한 번도 끊기지 않고 이어져 왔다는 만세일계(萬世一系)를 믿는 일본의 국민들에게 덴노가 직접 국가를 다스린다는 형식은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법과 제도의 생성 및 개혁의 조치들은 덴노의 이름으로 시행되었고, 국가 권력이 작동하는 근원에 덴노가 자리 잡게 되었다. 메이지 유신이라는 근대화를 추진한 장본인은 아니었지만, 근대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상징적 인물로 메이지 덴노를 바라보면 된다. 즉위 당시 나이가 14세에 불과했다는 점만 봐도 실체적 주도권을 가진 인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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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도쿠가와 요시노부 쇼군(좌측 상단)이 권력을 덴노에게 반환할 계획을 선포하는 대정봉환을 그린 작품 / (우) 메이지 덴노 사진 (출처: Wikimedia Commons)




신사가 아닌 신궁으로 격상한 이유

앞서 얘기했듯이 메이지 덴노는 유신의 상징적 인물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모든 개혁 조치들은 덴노가 하사한다는 명분을 가졌었기 때문에 국민들에게는 권력의 정점에 있는 인물로 분명하게 인식되었다. 그는 1912년에 사망했고 8년 후인 1920년 도쿄에 메이지 신궁이 창건된다. 신토에서는 거의 모든 것을 신격화할 수 있기 때문에 덴노를 신으로 모시는 신사가 건립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왜 신사가 아닌 신궁인가?

일본은 덴노나 그의 친족, 또는 그들의 조상을 모신 경우에만 신궁으로 격상한다. 일본 내 신궁이 총 24개에 불과하니 모든 덴노가 신궁으로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메이지 신궁 외에 가장 대표적인 곳이 이세 신궁(伊勢神宮)인데, 이곳은 일본의 건국 신화에서 태양을 관장하는 최고 신이며, 덴노 혈통의 시작으로 보는 신화적 존재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를 신으로 모시고 있는 곳이다. 그만큼 일본 근대화의 상징성이 강한 메이지 덴노도 높은 위상을 가진 존재로 인식시키기 위해 신사가 아닌 신궁으로 격상한 것이다. 또한 메이지 신궁이 건립되던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로, 당시 일본 내부에서는 민주화에 대한 요구와 사회주의 사상의 확산 등으로 덴노의 지위가 흔들리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흐름 때문에 덴노 체제를 보다 공고히 하고 근대 일본을 탄생시킨 출발점으로써 공간을 활용하고자 하는 시도도 담겨 있었다. 즉 근대화를 기반으로 군국주의까지 다다랐던 일본 국가 이념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공간으로도 기능하기 때문에 단순히 추모 공간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이다.

말하고자 하는 목적만큼이나 메이지 신궁은 규모 면에서도 엄청나다. 도쿄 도심 한복판에 약 120만 ㎡(외원 포함)의 부지에 약 10만 그루의 나무를 인공적으로 조성한 국가 주도의 프로젝트였으며, 이세 신궁 다음으로 큰 규모이다. 서울숲의 부지가 116만 ㎡이니 어느 정도 큰지 가늠이 될 것이다. 당시 일본이 근대화를 어떻게 바라봤는지, 그리고 그것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얼마나 안간힘을 썼을지 읽어볼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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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1일 메이지 신궁에서 참배하는 인파




사케와 와인, 전통과 근대 및 일본과 서양의 대비를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전시

메이지 신궁을 둘러보면서 가장 특이했던 것은 정문에서 본전으로 가는 참배로에 위치한 수십여 개의 사케통과 와인통이었다. 두 가지 술통들이 정확히 마주 보도록 배치되어 있어 더 궁금증이 일었다. 신궁이 설명하는 바에 따르면, 사케통들은 메이지 덴노와 쇼켄 고타이고를 신으로 모시는 신앙을 공유하는 민간 후원 조직인 고토카이(講友会)를 비롯한 일본 각지의 양조업자들이 매년 봉헌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메이지 신궁은 이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일본의 전통문화를 지탱하는 사케 양조산업의 번영을 기원한다는 의미에서 이와 같이 전시하고 있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와인통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와인통의 전시는 비교적 최근이었다. 일본인 사업가이자 프랑스 부르고뉴(Bourgogne) 명예시민인 사타 야스히코(佐多康彦)가 지역의 와이너리들에게 요청해 2008년 그들이 공동으로 봉헌한 것이라고 한다. 메이지 신궁은 와인 기증자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은 물론 세계 평화와 우호의 정신을 상징하는 봉헌물이라 말한다. 기증 자체가 고마운 것도 있고, 메이지 신궁과 같은 국가적 상징 공간에는 어울릴 법한 전시물이라 생각도 했지만, 이면에 있는 전시의 의도도 분명해 보였다. 누구나 알 수 있듯이, 와인은 서양을 대표하는 술이다. 그것도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은 세계적으로 명성 높은 와인 산지이다. 즉 와인은 서양 그 자체를 의미하는 상징물이고, 일본을 상징하는 사케를 바로 앞에 배치함으로써 서양과 일본을 병렬적 존재로 보여주고자 했던 의도였다.

메이지 유신 당시 덴노는 "옳은 것을 취하고 그릇된 것을 버림으로써 우리는 해외 여러 나라와 견주어 손색이 없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겼는데, 이는 '일본의 정신과 서양의 지식'을 의미하는 화혼양재(和魂洋才)라는 개혁 슬로건의 근간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대중보다 앞서 상투를 자르고 서양식 복장을 착용하였으며, 육식 금지 정책을 철폐하면서 먼저 고기를 먹었고, 와인 또한 즐기는 등 서양 문명을 받아들이는데 모범을 보였었는데, 이 행보를 공간적으로 해석한 사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케통은 일본, 전통문화, 국내 산업을 의미하는 전시물이고, 와인통은 서양, 근대 문화, 국제 관계를 의미하는 전시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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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신궁 내에 전시한 사케통(좌)과 와인통(우)




연간 1,000만 명이 방문하는 곳

무엇이든 신격화할 수 있는 신토라는 토속신앙과 신을 모시는 공간인 신사, 그리고 신사에서 복을 기원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본의 종교 문화를 배경에 두고 생각해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메이지 신궁에 방문하는 이유도 쉽게 알 수 있다. 특히 국가에서 신격화한 메이지 덴노를 모신 곳이라면 더 큰 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기대감과 넓은 규모에서 충족되는 풍요로움까지 느낄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나 많은 일본인들이 모두 메이지 덴노를 추앙하기 때문에 신궁에 방문한다고 단편적으로 연결하면 이 공간을 제대로 해석하기 힘들다. 굳이 메이지 덴노라는 사람을 추앙하지 않더라도 개인의 복을 기원하기 위해 방문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의 일본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동아시아의 근대사에서 메이지 신궁을 바라보면 중립적으로 생각하기 어렵다. 을사늑약과 한일강제병합, 청일전쟁, 러일전쟁 모두 메이지 덴노 시기였고, 제국주의로 가는 발판을 설계하고 정당화한 인물을 신격화한 곳이기 때문이다. 감정적으로만 바라보면 방문조차 꺼려질 수 있는 곳이지만, 일본의 종교 문화를 이해하려는 목적, 그리고 일본이 근대사를 어떻게 기억하고자 하는지 알고 싶은 목적이 있다면 가장 적합한 장소가 아닐까 싶다.




Epilogue

신사에 대해 찾다 보니 최근 한류의 열풍을 확인할 수 있는 신사도 있었다. 도쿄 니혼바시에 위치한 후쿠토쿠 신사(福徳神社)는 과거 복권 당첨의 기원을 비는 곳이었는데, 최근에는 K-pop 티켓 당첨을 기원하는 팬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신사에서도 이에 부응해 티켓 선정 기원제를 별도로 운영하며 당첨운을 높여준다는 토미쿠지 마모리(富くじ守り) 부적을 판매한다. 도쿄 신오쿠보의 가이추 이나리 신사(皆中稲荷神社)도 유사한 곳이다. 가이추가 '모두 적중한다'라는 뜻을 담고 있어 화살이 과녁에 꽂히듯 티켓 응모에 당첨되기를 바라는 팬들이 찾는다고 한다.


후쿠토쿠 신사(福徳神社) https://maps.app.goo.gl/iosgsQ5DbzgiXHxY9


가이추 이나리 신사(皆中稲荷神社) https://maps.app.goo.gl/tWrfL7JqskXNwUhS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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