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건과 소실의 반복, 오사카성

#035. [일본] 오사카성 (大阪城)

by Muse u mad
오사카를 상징하는 유적지이자 관광지
에도 막부부터 현대 일본까지 역사를 관통하는 오사카의 랜드마크
<오사카성>

오사카의 랜드마크, 바로 오사카성(大阪城)이다. 정확히는 오사카성 내에 우뚝 솟은 천수각(天守閣)이 대부분의 여행객들에게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건립했다는 사실부터 떠오르지만, 오사카의 랜드마크를 가보진 않을 수 없다. 봄철 벚꽃과 조경, 멋진 해자 덕택에 산책하기엔 너무 좋은 곳이지만, 역사적 흔적을 찾아보기 힘든 깨끗하게 도색한 모습, 그리고 생각보다 작은 천수각에 실망하기도 한다. 내부로 들어가면 엘리베이터까지 있어, 재건축한 현대적 건물임을 바로 알게 되면서 또 한 번 아쉬움을 느끼게 되는 곳이 바로 오사카성이다.

건축물 자체가 역사의 상흔을 담고 있어야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보통의 경우에는 당시의 건축양식과 모습을 최대한 가깝게 고증하여 건축함에도 불구하고, 오사카성은 꼭 그렇진 않았다. 그래서인지 유적지라기보다는 관광지로써의 느낌이 강했는데, 성 내에는 주류를 파는 식당도 있고 스트리트 서커스를 하는 버스커도 있었다. 우리가 경복궁이나 덕수궁에 방문했을 때의 느낌과는 전혀 다르다. 유적지를 관리하고 활용하는 방식은 국가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일본의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비판적 시선을 말하고자 함은 것은 아니다. 오사카성의 과거부터 현재까지 따라가 보면 그 이유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줄 요약

✔️ 오사카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흔적, 도쿠가와 막부의 정치적 권력, 시민들의 성금을 통한 재건, 태평양 전쟁으로 인한 소실과 재건축까지, 에도 막부부터 현대 일본까지의 역사가 켜켜이 쌓인 곳이다.


유적지 개요

✔️ 명칭: 오사카성 (大阪城, Osaka Castle)

✔️ 홈페이지: https://www.osakacastle.net/

✔️ 지역: 일본 오사카부 오사카시 주오구

✔️ 위치: https://maps.app.goo.gl/NFZvASoBQP7uBzJA9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사카를 택한 이유

오사카는 예로부터 일본의 경제와 물류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오사카는 요도강(淀川)과 야마토강(大和川)이 만나는 거대한 삼각주 지형으로, 강에서 갈라진 지천이 많고, 이들을 인공적으로 연결한 운하도 많아 교통이 발달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오사카 여행 시 필수적으로 방문하는 도톤보리(道頓堀)도 인공 운하 중 하나다. 교통의 요지라는 이점 덕분에 천년 수도 교토(京都)의 외항으로 성장하여 오랫동안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는데, 에도 막부 시절에는 '천하의 부엌(天下の台所)'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단순히 먹거리가 많다는 의미보다는 일본 전국의 물류와 금융이 오사카를 거친다는 의미를 가진다. "에도(도쿄)의 사무라이는 칼을 믿고, 오사카의 상인은 장부를 믿는다."는 말이 있었던 만큼 오사카는 상대적으로 실용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문화를 구축했던 곳이었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사카를 일본의 중심으로 낙점했던 이유는 경제적 이유에 더해 지형적 조건도 있었다. 두 강 덕분에 적군이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진입하기 어려웠고, 현재 오사카성이 위치한 자리는 주변보다 지대가 높아 적의 움직임을 미리 파악하고 방어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오사카성 이전에 이 자리를 지켰던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를 상대로 무려 10년 동안이나 버텼던 사실을 보면 군사적으로도 최적의 입지였던 점은 분명해 보인다. 참고로 이사야마 혼간지는 일본 불교의 한 종파인 정토진종의 본산이 있던 곳으로, 수만 명의 승병과 신도들이 거주했던 종교 국가와 같은 곳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이 10년의 철벽 방어를 보고 이 자리에 그대로 오사카성을 세운 것이다. 그는 이곳을 경제와 군사의 사령부로 삼았었고, 훗날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침략하는 병참기지로 활용하였다.

오사카성 내 천수각 전경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흥망과 함께한 오사카성

1582년 오다 노부나가가 죽고 정권을 잡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3년 오사카성을 건립하고 수도로 삼았다. 이시야마 혼간지가 있던 터를 모두 불태우고, 그 위에 오사카성을 세운 것이다. 앞서 언급한 지형적 조건에 더해, 그는 대규모 이중 해자까지 구축해 적군의 도강을 차단할 수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었다. 당대 최고의 성이자 요새로 불렸던 이유다. 첫 번째 해자를 건너더라도 높은 성벽에 막혀 공격을 버텨내기 어려웠으며, 두 번째 해자까지 기다리고 있어 본성까지 들어가는 것은 당시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웠다고 한다.

(좌) 도쿠가와 이에야스 침공 당시의 오사카성(출처: Wikimedia Commons) / (우) 오사카성 평면도. 이중 해자의 구조를 알 수 있다(출처: kotobank.jp)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정권을 잡은 후에도 오사카성은 히데요시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와 그의 가문에 충성하는 세력의 본거지로 남아 있었다. 이들은 이에야스에 대항하기 위해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를 일으켰으나 패배하고 만다. 덕분에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막부의 최고 권력자를 상징하는 정이대장군의 지위를 획득하고 에도를 행정의 중심지로 삼으면서 본격적인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히데요리를 남겨둘 수 없었던 이에야스는 결국 1614년 오사카성을 침공(오사카 겨울의 진, 冬の陣)하는데, 오사카성의 강력한 방어를 뚫지 못하고 화친을 제의한다. 성의 해자를 도요토미 측이 직접 메운다는 조건으로 히데요리는 화의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도쿠가와 측이 직접 해자를 메우고 성곽의 일부까지 파괴하자, 이에 반발하면서 1615년 다시 한번 전투(오사카 여름의 진, 夏の陣)가 시작된다. 하지만 해자가 메워진 오사카성은 힘을 쓰기 어려웠고, 약 한 달 만에 패배하고 히데요리와 그의 모친 요도도노는 할복하여 생을 마감한다. 오사카성도 결국 모두 소실되었고, 해자 또한 완전히 매립되었다. 약 20만의 대군으로도 오사카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을 만큼 오사카성의 해자와 성벽 구조, 입지는 완벽한 요새였다. 특히 해자의 유무는 방어의 성공을 가를 만큼 중요한 요인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그들은 외부와 고립될 수밖에 없었는데, 식량과 탄약 등의 보급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해자는 역설적으로 패배의 요인이 되기도 했다.

(좌) 히데요리와 요도도노가 자결한 터에 세운 기념비 / (우) 천수각 앞에서 찍은 사진으로 실제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절의 성벽은 바닥 아래에 있다.




재건과 소실의 반복된 역사, 오사카성

에도 막부 두 번째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는 오사카성의 재건을 명한다. 오사카성 그 자체가 중요했기 때문이 아니라, 도요토미 가문의 유산을 땅에 묻고, 도쿠가와 가문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정치적 목적 때문이었다. 기존 성의 잔해 위에 수 미터의 흙을 덮어버리고 재건하면서 도쿠가와의 권위를 시각적으로 선포하였으며, 성을 짓는데 전국의 다이묘들의 재산과 노동력을 동원함으로써 그들의 충성심을 테스트하였다. 이미지에서 볼 수 있듯이, 가장 아래 단으로부터는 무려 10m 이상, 중간 단으로부터는 6m 높이의 흙을 쌓아 전체 지반을 평평하고 높게 만들었다. 즉 현재 우리가 오사카성에서 밟고 있는 땅은 도요토미 시절보다 훨씬 높은 곳이며, 진짜 도요토미의 성벽은 땅 아래 묻혀 있다.

도쿠가와 막부가 묻어버린 도요토미 시절의 성벽 (출처: osakacastle.net)


오사카성의 풍파는 이후에도 계속된다. 1665년에는 낙뢰로 인해 천수각이 타버린 후 오사카성은 천수각이 없는 상태로 유지되었는데, 에도가 권력의 중심지였기 때문이었을까? 도쿠가와 막부에게는 엄청난 재정을 들여 다시 재건할 여력도 의지도 없었던 것 같다. 천수각이 없는 상태로 그대로 유지되던 오사카성은 은 에도 막부 말기 존황양이 세력과 벌어진 보신전쟁(戊辰戦争)에서 메이지 정부군에 의해 성 내의 다른 건물들까지 대부분 불타버리기도 했다. 폐허처럼 남은 이 지대를 메이지 정부는 군사 구역으로 바꾸고 무기제조 공장을 들이게 되면서 남아있는 건물들마저 철거되거나 개조되는 수난을 겪게 되었다.

지금 우리가 보는 오사카성과 천수각은 1931년 재건된 것이다. 당시 오사카 시장이 재건을 제안하였고, 오사카 시민들은 이를 위해 기금을 모았다. 그리고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재건축한다. 당시의 건축법상 방화와 내진 등을 이유로 목조 건축은 불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재건된 지 불과 14년 후, 1945년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군은 오사카에 네이팜탄을 쏟아부어 천수각을 제외한 오사카성 전체는 다시 잿더미가 되고 만다. 철근 콘크리트로 지은 덕분에 천수각 본체는 살아남는다. 종전 이후 오사카성은 한번 더 재건한다.

이시야마 혼간지로 시작된 성터,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의 상징물로 건축,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파괴, 도요토미 가문의 흔적을 덮어버린 도쿠가와 막부의 정치적 건물로 재건축, 낙뢰로 소실된 천수각, 보신전쟁으로 폐허가 되고 무기공장으로 쓰인 성터, 시민들의 성금으로 재건, 태평양 전쟁으로 다시 한번 잿더미, 그리고 현재의 모습까지, 오사카성의 역사는 에도 막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역사와 함께 한다.

(좌) 철근 콘크리트로 재건하는 천수각(Wikimedia Commons) / (우) 태평양 전쟁 당시 천수각만 남기고 폐허가 된 모습 (catalog.archive.gov)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실제 쌓았던 성벽을 볼 수 있는 곳, 이시가키관

오사카성 내에는 도요토미 이시가키관(豊臣石垣館)이 있다. 도요토미 시절 실제 쌓았던 성벽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현재의 오사카성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당시의 흔적이 없기 때문에, 초기 오사카성의 잔해를 찾고 싶었을 것이다. 일본 정부는 1984년 발굴 조사를 통해 땅속 깊이 묻혀 있던 당시의 성벽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이를 대중에게 공개하기 위해 2025년 박물관 형태로 도요토미 이시가키관을 오픈하였다. 거칠게 쌓긴 했지만, 도요토미 시기의 성벽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다.

(좌) 발굴된 성벽 (출처: cic.nomurakougei.co.jp) / (우) 발굴된 성벽의 위치(붉은색 원) (출처: osakacastle.net)


도요토미 시절의 성벽 외에도 또 하나 특징적인 장소가 있다. 오사카성 천수각이 위치한 구역인 혼마루 정문을 지나면 눈앞에 엄청난 거석이 존재한다. 문어 바위라 칭하는 타코이시(蛸石)이다. 적군이 성문으로 들어오게 되면 압도적인 크기의 바위를 마주하게 되는데, 적군의 사기를 꺾고 공포심을 주기 위한 전략적 목적이었다고 한다. 무려 108톤에 달하는 이 거대한 바위는 이 지역에 원래부터 있던 바위가 아니라, 쇼도섬(小豆島)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당시 도쿠가와 막부가 다이묘들에게 충성심 경쟁을 시키면서 심리적 항복을 받아내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일부러 멀리서부터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단순히 거대한 바위가 아니라,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에도 막부를 연 도쿠가와 가문의 위상을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전 세계 어디나 거석을 통해 권위를 보여주고자 했던 권력욕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이 거대한 바위에 왜 문어 바위라는 애칭이 붙었을까? 바위의 왼쪽 하단을 보면 문어의 머리와 다리 모양의 얼룩이 보이는데, 옛날부터 이를 본 사람들이 문어와 닮았다고 하여 부르기 시작했고, 공식 명칭으로 자리 잡는다.

문어 바위의 모습 (출처: Wikimedia Commons)




Epilogue

서두에도 언급했듯이, 오사카성은 에도 막부부터 일본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역사가 담겨 있는 곳이다. 하지만 역사와 전통을 담은 곳을 즐기는 공간의 분위기는 우리와 사뭇 달랐다. 해자에서 관광용 배를 타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 바비큐와 술을 파는 식당이 천수각 가까이에 있었고, 거리 공연을 하는 버스커들까지, 유적지를 즐기는 방식이 여타 다른 곳들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물론 어디나 문화를 즐기고 소비하는 방식은 다르고, 이 또한 다양성의 영역이다. 수없이 반복된 소실과 재건의 역사 속에서 현대적으로 재건축된 최근의 모습까지 이어져 온 오사카성인만큼, 즐기는 방식도 그만큼 다양하게 변화하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수각 바로 앞에서 길거리 공연 중인 모습. 유적지를 즐기는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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