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로 건너간 한국인의 발자취

#008. [일본] 오사카 코리아타운 역사자료관

by Muse u mad

일본에는 도쿄, 요코하마, 교토 등 다양한 곳에 코리아타운이 존재하지만, 그중에서도 오사카 이쿠노구(生野区) 지역에 위치한 코리아타운은 단연 가장 크고 오래된 한국인 정착촌이다. 현재도 약 2만여 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음식을 팔고 K-pop 기념품으로 장사하는 여타 코리아타운과 비슷해 보이지만, 이 지역은 한국과 일본 사이의 오래된 역사가 켜켜이 쌓인 곳이다.

그렇지만 왜 오사카인지 궁금했다.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곳은 후쿠오카도 아니고, 수도 도쿄도 아닌 오사카에 왜 가장 많은 한국인이 거주하게 되었을까? 2023년 4월 개관한 오사카 코리아타운 역사자료관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방문하였다. 그런데 코리아타운 입구에서 '백제문(百済門)'이란 큰 구조물을 보았다. 백제가 많은 문물을 전해주었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그 이유까지도 또 궁금해졌다.

코리아타운 백제문.jpg 오사카 코리아타운의 '백제문'



한 줄 요약

✔️ 백제 도래인부터 조선통신사와 재일한국인까지 오사카의 한국사를 코리아타운에서 되짚어보다.


박물관 개요

✔️ 명칭: 오사카 코리아타운 역사자료관 (Osaka Korea Town Museum; 大阪コリアタウン歴史資料館)

✔️ 홈페이지: https://oktmuseum.or.jp/ko/toppage-ko/

✔️ 주소: https://maps.app.goo.gl/A1Vua1vGjiYEFvNW7



백제 왕인박사와 도래인

사실 그동안 왕인박사(王仁博士)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언급된 적이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서 일본서기(日本書紀) 등에서는 왕인이란 백제의 인물이 일본에 천자문과 논어를 전했다고 기록한다. 덴노(天皇)의 태자는 왕인으로부터 교육을 받아 통달하지 못한 게 없었다고 적혀있다. 우리에게는 신화와 같은 인물이지만, 오사카 옆 히라카타시(枚方市)에 왕인의 무덤이 있고, 도쿄 우에노공원에는 왕인의 비가 있을 정도로 그의 업적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사실이라면 일본에 학문이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도, 아스카문화의 형성에도 왕인이 큰 기여를 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교류가 왕인으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다. 여러 이유로 3세기 후반부터 7세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왕인의 생몰도 4세기 경으로 추정하고 있으니 일본 이주에도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는 추정된다. 이 시기 일본으로 넘어간 사람들을 일본에서는 건너온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도래인(渡來人)'이라 칭했다. 단순히 사람의 이동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관개 및 벼농사 기술, 청동기∙철기 제련 기술, 양잠, 건축, 토기제조 기술 등을 전해준 것이기도 했다. 이 도래인들의 초기 정착지가 당시 야마토정권의 수도인 나라 지역을 비롯한 오사카, 교토 일대였다. 그중에서도 현재 코리아타운이 위치한 이쿠노구가 주요 정착지였다.

오사카 코리아타운 초입에는 작지만 고요한 미유키모리 신사(御幸森天神宮)가 있다. 약 1,600여 년 전 닌토쿠덴노(仁德天皇)가 백제 도래인을 시찰하기 위해 들른 것을 기념해 그의 사후 건립한 신사이다. 이 신사 안에는 왕인박사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왕인박사의 노래를 기리기 위해 재일동포와 일본인이 함께 2009년 세운 것이다. 당시 백제에서 도래한 왕인박사가 '나니와즈노우타(難波津の歌; 오사카의 노래)'란 일본 시(和歌)를 지어 닌토쿠덴노에게 전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에도시대에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12회(오사카에는 11회)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목적도 언급하고 있다. 나니와는 오사카의 옛 명칭이다.

KakaoTalk_20250712_152759912_01.jpg 미유키모리 신사 내에 있는 '오사카의 노래' 안내문. 한글과 일본어로 병기되어 있다.




조선통신사의 중간 기착지, 오사카

도래인 이후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한일 교류는 끊이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이 조선통신사이다. 최근 이를 재현한 행사가 열렸다. 전남 목포에서 출발해 부산, 대마도, 이키섬, 시모노세키, 구레 등 약 1천 km를 항해한 후 오사카에 도착하는 옛 조선통신사의 뱃길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관련기사)

조선통신사의 최종 목적지는 당연히 에도(현 도쿄)였다. 오사카까지 항해한 후 육로를 통해 에도까지 간 것이다. 오사카를 중간 기착지로 삼았던 이유는 대규모의 항구가 있는 대도시였을 뿐 아니라, '천하의 부엌'이라 불릴 만큼 식문화가 발달해 있었고, 교토만큼이나 문인과 학자가 몰려있던 지역이기 때문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한 후 오사카를 거점으로 삼았으니 도시의 발전은 당연했을 것이다. 항해에 지친 조선통신사가 융숭한 대접을 받고, 일본 지식인들과 교류하는 첫자리가 오사카였던 셈이다. 미유키모리 신사에서 언급했듯이,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총 12회의 조선통신사 방문에서 11회를 오사카에 방문하였으니 빠질 수 없는 지역임에는 분명했다.

조선통신사 지도.jpg 조선통신사 이동경로 (출처: 교토∙나라 문화재 사이트)


민백-39871_조선통신사.jpg 조선통신사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생계를 위해 오사카로

한일강제병합 전까지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은 많지 않았다. 일본의 근대화를 배우기 위한 유학생들 정도에 그쳤다. 다만, 조선 내부의 정치적∙사회적 혼란과 흉작, 세금 증가, 농민 반란과 지역 봉기의 증가 등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비공식적으로 건너간 조선인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란 추정도 있다. 강제병합 이후, 일본의 근대화와 제1, 2차 세계대전의 파급효과로 인해 일본 내 노동력이 크게 부족해졌고, 이때부터 많은 조선인들이 넘어가기 시작했다. 일본의 수탈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도 그 대상이었다. 1915년 약 4천여 명에 불과하던 재일조선인이 1920년 3만 명으로 급증하였고, 도일하는 사람들은 그 이후에도 계속 늘어 1944년에는 약 2백만 명까지 증가하였다.

이들이 가장 많이 향한 도시 중 하나가 바로 오사카였다. 당시 오사카는 일본 최대의 산업도시 중 하나로 '동양의 맨체스터'라 불리며, 군수·섬유·제철·건설 등의 분야에서 저임금 노동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조선통신사 덕에 항로도 개척되어 있어 교통 접근성도 좋았다. 이로 인해 과거 도래인들이 많았던 이쿠노구 등을 중심으로 조선인들은 정착을 시작했고 현대 코리아타운이 형성된 토대가 되었다.




미완의 오사카 코리아타운 역사자료관

주거지 안에 위치한 아주 작은 건물이었다. 너무 작은 공간이라 아쉬웠지만, 입구에 한글로 적힌 '공생의 비'가 눈길을 사로잡아 바로 입장했다. 내 기대가 컸기 때문일까, 안내하시는 분부터 한국어를 전혀 할 줄 몰랐고, 전시물에도 한국어 안내가 전혀 없어 들어가자마자 적지 않은 실망감이 밀려들었다. 직원(사실 정식 직원이 아니라 돌아가면서 자리를 지키는 느낌이 강했다)은 한국어 안내가 없어 연신 죄송하다고 했다.

코리아타운에는 백제문을 세워두고 미유키모리 신사에는 백제시대 인물 왕인의 노래비가 세웠지만, 이 자료관에는 근대 이후 처음 도착한 조선인의 사진과 문서 전시물 정도만 있을 뿐이다. 그마저도 모든 일본어를 번역해 읽을 수 없었기에 자료관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온전히 파악하지 못했다. 생존을 위해 오사카에 도착한 한민족의 투쟁의 역사를 볼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충족하지 못해 아쉬움이 컸다.

그렇지만 한 가지 위안은 현재가 자료관이 완성이 아닌 설립 '과정'에 있다는 점이다. 이 자료관은 정부의 주도로 큰 예산이 투입된 곳도 아니고, 수많은 역사학자의 고증을 거쳐 만든 곳도 아니다. 코리아타운에 사는 몇몇 재일한국인과 취지에 공감하는 일본인들이 십시일반해 세운 장소이다. 현재도 찬조회원 모집이 없다면 운영이 어려워 보인다. 한국의 식문화를 소개하고 판매하는 첫 한일문화교류시설 '반가쇼쿠코보(班家食工房)'를 설립한 지 20년이 지나서야 한국인의 역사를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을 설립하게 된 것으로, 이제 막 발걸음을 뗀 것이 불과하다. 설립 후 2년이 지난 현재, 공간 구성도, 전시물도, 직원의 수준도 모두 내 눈높이에 맞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어떻게 오사카 내 한국인의 역사를 잘 꿰어 보여줄지는 궁금해졌다. 10년 후 다시 한번 방문할 것을 기약한다.

공생의비.jpg 오사카 코리아타운 역사자료관. 입구에 있는 한글 '공생의 비'가 눈에 띈다.




Episode

코리아타운 주변을 찾다가 우연히 '미나미구다라소학교(大阪市立南百濟小學校)'란 곳을 찾았다. 150여 년 전인 1874년에 개교한 학교로 우리말로 '남백제초등학교'다. 혹시 재일한국인이나 조선족만 다니는 학교일까 궁금해 찾아봤지만, 여타 초등학교와 다를 바 없는 일반적인 학교였다. 7세기 경 초등학교가 있는 지역의 명칭이 백제군이었기 때문에 이를 따라 남백제초등학교라 명명했다고 한다. 상술했듯이 오사카 지역은 워낙 많은 백제인이 넘어와 살았기 때문에 도시 곳곳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백제대교도 있고, 백제강도 있었다.


미나미구다라 소학교(남백제 초등학교) https://maps.app.goo.gl/weBGMVBnXQFjxEEV9


Appendix. 국내의 왕인박사 유적지

왕인박사에 대해 찾아보다 보니, 우리나라 영암군에서는 이미 왕인박사 마을을 조성해 관광지화 하였고, 매년 영암왕인문화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무엇보다 왕인박사 유적지를 대규모로 조성하였는데, 사당, 유허비, 동상, 전시관 등이 있다. 실존했는지 여부도 아직 논란이 있는데 이토록 노력하는 이유는 왕인박사가 영암에서 태어났다는 전승이 있기 때문이다. 이 또한 확실한 것은 없지만 진실이길 바란다. 그래야 영암군의 노력이 빛을 발할 것 같기 때문이다. 신화 속 인물인 서복이 다녀갔다는 설 때문에 서귀포, 함양, 남해, 거제에서 이를 관광 콘텐츠화하려 노력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기억해 둔다.


왕인박사 유적지 https://maps.app.goo.gl/kDyZjvrs9pEUdf4y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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