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인천] 인천개항박물관 & 대불호텔전시관
페르시아의 서사시 쿠쉬나메(Kushnameh)를 아는가? 사산왕조 페르시아가 멸망하면서 왕자 아비틴(Abtin)이 중국을 거쳐 신라에 망명하였고, 신라 공주와 결혼한 후 복수를 위해 현재의 바그다드 지역으로 복귀했다가 전사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역사적 진실이 밝혀진 이야기는 아니지만, 사산왕조 페르시아가 멸망한 7세기부터 중동과 교류가 있었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지리적으로 극동아시아에 위치해 있고 강제 개항을 당한 역사적 기억으로 우리는 세계 교역의 변방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되짚어보면, 이미 삼국시대부터 당나라는 물론, 일본과 교류했던 증거들이 충분하고, 고려시대 벽란도(碧瀾渡)는 송나라, 일본, 이슬람권 상인까지 오가는 국제적인 무역항으로 이미 기능하고 있었다. 고려라는 국호가 이때 이슬람으로 넘어가면서 '코리아'의 어원이 된 것으로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우리는 의도적으로 고립의 길을 선택했고, 19세기가 되어서야 강제 개항을 통해 근대세계의 체제로 끌려들어 왔다. 세계사의 흐름이 바람직했는지의 여부와는 무관하게 조선시대는 세계사적 단절을 겪었던 시기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인천개항박물관과 그 옆에 있는 대불호텔전시관을 통해 우리가 교역의 문을 닫았던 이유와 개항된 역사를 회고해 보았다.
✔️ 스스로 바닷길을 닫았던 조선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강제 개항된 슬픈 역사보다는 세계와 다시 연결된 출발점인 인천과 마주하다.
✔️ 명칭: 인천개항박물관 & 대불호텔전시관 (Incheon Open Port Museum & Hotel Daibutsu Museum)
✔️ 홈페이지: https://ijcf.or.kr/load.asp?subPage=522 (인천중구문화재단 홈페이지)
✔️ 주소: https://maps.app.goo.gl/bDaMWupm2Qg3D2fRA
✔️ 주소: https://maps.app.goo.gl/gx7XkP2GhadGfGmq8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시대 수도 개경에는 벽란도 항구를 통해 많은 교역이 이루어지다 보니 회회인(回回人: 무슬림) 마을도 있었고, 그들은 모스크를 지어 종교활동도 하였으며, 상점과 숙박업소까지 운영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태종은 무슬림이 조선에 살길 원하자 집을 주고 정착하도록 도왔다는 사실, 세종이 즉위할 때에도 이슬람 성직자가 쿠란을 읽으며 국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회회송축(回回頌祝)을 행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슬람에 한정된 예시이지만, 조선 초까지만 해도 종교적,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국가였음은 분명해 보인다.
이후 조선의 교역이 감소한 이유는 몇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조선은 명나라의 충실한 제후국으로써 스스로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사대교린(事大交隣) 정책을 펼쳤다. 큰 나라는 섬기고 이웃 나라와는 사귄다는 의미이지만, 실제로는 명나라와의 조공무역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명과의 외교관계에 따라 다른 국가들과는 제한된 교역을 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 당시는 왜구의 침입이 매우 잦았던 시기였다. 고려 말 169년 동안 왜구의 침입만 총 519회에 달했다고 하니, 세종이 왜 대마도를 정벌했는지 이해가 간다. 하지만 이로 인해 해안지역을 폐쇄하는 해금정책을 실시하면서 민간의 자발적 해상무역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셋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외국과 교류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졌다. 전쟁 후 국가 재건과 내치에 집중해야 했고, 국제무역과 외교에 신경 쓸 틈은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유교적 이념에 따라 국가를 통치했기 때문이었다.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은 억제한다는 중농억상(重農抑商) 정책 덕에 상업은 이익만 추구하는 비도덕적인 활동으로 취급받았고 상인 또한 전혀 존중받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조선 후기 실학이 등장했지만, 유교적 이념을 넘을 수는 없었고 여전히 상업, 기술, 무역은 사회적으로 천시받는 분야였다.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강화도조약(1876)으로 개항은 시작되었다. 정식 명칭은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이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국가로 급속하게 성장한 일본은 수도의 관문인 강화해협에 불법으로 침입해 연안 포대의 포격을 유발한 운요호(雲揚號) 사건(1875)을 계기로 조약 체결에 성공한다. 총 세 곳의 항구를 개항하는 조건이 포함되어 있었고, 결국 조선은 1876년 부산과 원산, 1883년 인천(제물포)을 개항하였다. 서해, 남해, 동해에 하나씩 개항한 셈이고, 특히 인천은 서해안 최대 항구라는 이점, 서울과 가깝게 연결되는 교통의 이점, 조선 진출을 위한 군사∙외교∙무역의 거점으로 적합하다는 이점이 있어 전략적으로 중요한 개항지였다. 다음은 강화도조약의 주요 내용이다.
조선은 자주의 나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조선은 부산 이외에 두 항구를 20개월 이내에 개항하여 통상을 해야 한다.
조선은 연안 항해의 안전을 위해 일본 항해자로 하여금 해안 측량을 허용해야 한다.
개항장에서 일어난 양국인 사이의 범죄사건은 속인주의에 입각하여 자국의 법에 의하여 처리한다.
양국 상인의 편의를 꾀하기 위해 추후 통상 장정을 체결한다.
강제 개항은 뼈아프지만, 개항 이후 인천이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했다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개항장 주변 지역은 서양인과 화교들은 물론, 경제활동을 목적으로 조선인도 몰리면서 인구가 급증하였고, 그에 따라 도로망 정비, 항만 매립, 공원 조성 등 서양식 구조의 도시로 변화해 갔다. 당시 몰렸던 화교 덕분에 중국인 커뮤니티가 형성되었고, 현재도 인천에 차이나타운이 남아 있는 배경이 되었다. 1899년에는 경인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서울과 인천 사이 이동시간이 12시간에서 1시간 40분으로 크게 단축되었고, 이는 곧 도시 간 연결성과 상업적 활력을 비약적으로 높였다. 자연스럽게 우체국, 전신국, 은행, 병원, 호텔 등이 세워지면서 인천은 동북아의 국제도시로 올라서기 시작했다.
인천시는 이곳을 인천 개항장 거리로 명명하고 당시의 거리 분위기를 남기고 있다. 일본인이 거주하던 조계지로써 당시의 근대건축물들이 즐비하다. 물론 복원된 것이 대부분이다.
국제도시로 변모한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 대불(大佛)호텔이다. 개항한 지 불과 5년 만인 1888년 개관한 최초의 서양식 호텔로, 외국인 수요를 겨냥해 일본인이 건립하였다. 당시 무역, 관광, 선교, 외교의 목적으로 조선에 들어오던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숙소였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커피를 판매했다고 알려진 곳도 대불호텔이다. 호텔이 성업하면서 중국인이 운영하는 Steward Hotel, 헝가리인이 운영하는 Hotel de Coree도 들어서 치열한 경쟁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가까운 중국은 그렇다 치더라도, 헝가리인이 조선까지 와서 호텔을 차렸다는 사실은 놀랍지 아니한가?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은 1899년 경인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숙박객의 실질적 수요가 줄어들었고, 호텔은 중국인에게 넘어가 중화루라는 식당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주거용으로 사용하다가 1978년 철거되어 기억에서 잊혀갔다. 그러나 2011년 신축공사 중 대불호텔의 터가 발견되어 문화재청이 보존을 추진하였고, 인천시는 복원을 결정하였다. 역사적 고증을 거쳐 대불호텔을 재현한 대불호텔전시관으로 재탄생하였다.
강제로 개항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수치스러운 역사일 수 있지만, 거대한 세계사 흐름에 올라타지 못한 우리의 아쉬운 실패 사례이기도 하다. 쇄국의 역사로 흘렀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더 기억에 남기고 곱씹어봐야 한다. 그렇지만 인천개항박물관과 대불호텔전시관, 이 주변을 둘러싼 인천 개항장 거리 모두에서 강제 개항의 슬픔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강제로 개항된 사실을 보여주는 콘텐츠에는 슬픈 흔적이 남아있지만, 현재 이 주변은 이국적인 건축물과 카페, 식당, 상점들이 가득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낭만을 불러일으키는 곳이 된 것 같다. 이미 인천은 글로벌화된 도시이고, 과거 아팠던 기억은 단지 추억일 뿐이라 말하듯 말이다.
인천개항박물관은 박물관 건물 그 자체로도 의미를 가진 곳이다. 이곳은 1883년 인천 개항 후 일본제1은행 부산지점의 인천출장소로 개설된 근대적 금융기관이었다. 1888년 인천지점으로 승격되었고, 초기에는 해관 통관세를 취급하였다. 1911년 조선은행 인천지점, 1950년 한국은행 인천지점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조달청 인천사무소, 법원 등기소 등으로 활용되다가 2010년 인천개항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호로 등록되어 있는 건물이다.
인천은 일본과 청나라의 조계지가 있었던 도시였던 만큼 개항 이후 다양한 역사적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 인천개항박물관과 대불호텔전시관 외에도 많다.
1.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 https://maps.app.goo.gl/iftdaXzBweMJkZUc6
2. 인천개항장거리 https://maps.app.goo.gl/3VfccVAcYMwZvh5JA
3. 청일조계지경계계단 https://maps.app.goo.gl/FHisVgubxxXYjptq6
4. 짜장면 박물관 https://maps.app.goo.gl/j6pSf1Kgyc3RWtuk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