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 [베트남] Cu Chi Tunnels
전쟁 역사상 가장 부도덕한 전쟁이자, 세계 1위 군사력 미국이 패전하고 전쟁의 꼬리표를 승전국에게 붙인 전쟁. 바로 베트남 전쟁이다. 세계적으로 '베트남 전쟁'으로 통용되지만, 베트남 현지에서는 침입국에 항전했다는 의미에서 '항미 전쟁(Resistance War Against America)'이라 칭한다.
여느 전쟁보다도 이 전쟁의 정당성은 더 찾아볼 수 없다. 당시 북베트남에 개입할 목적으로 군사적 조작을 서슴지 않았던 통킹만(Gulf of Tonkin) 사건, 고엽제(Agent Orange)로 베트남 산림과 농경지를 황폐화시킨 것은 물론 수많은 참전군인과 민간인, 그 후대에까지 남긴 고엽제 후유증, 300~500여 명의 무고한 민간인을 직접적으로 죽인 미라이 학살(My Lai Massacre) 등. 알면 알수록 강대국의 벗겨진 이면을 볼 수 있는 사례라는 생각이 든다.
미국을 이긴 최초의 국가라는 타이틀이 있기도 하고, 베트남 국민의 굳건한 저항정신을 보여준 사례이기 때문에 베트남은 전국에 전쟁에 기억을 잘 남겨두었다.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공간은 구찌 땅굴(Cu Chi Tunnels)이다. 베트남 전쟁을 승리하게 된 계기로 게릴라 전투를 꼽는데, 이 게릴라 전투의 본거지였기 때문이다.
✔️ 세계 최강 미국을 무릎 꿇린 베트남의 처절한 생존과 저항의 이야기가 담긴 곳, 지하도시 구찌 땅굴
✔️ 명칭: 구찌 땅굴 (Cuchi Tunnels; 베트남어: Khu di tích lịch sử Địa đạo Củ Chi)
✔️ 홈페이지: https://www.cuchitunnels.org/
✔️ 주소: https://maps.app.goo.gl/9A267HCL4zMFJtqs9
1954년 디엔비엔푸(Điện Biên Phủ) 전투에서 최종 승리한 북베트남은 드디어 자유의 성취를 맛보는 듯했으나, 1960년대 초 자본주의 질서를 수호한다는 명분하에 남베트남을 지원하는 미국의 군사적 개입이 시작되면서 다시 전쟁의 한복판으로 들어갔다. 누구나 세계 최강 군사력의 미국이 손쉽게 이길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베트남의 정글은 깊고, 국민들은 단단했다.
지리적 특성을 잘 모를 수밖에 없었던 미군은 수색작전을 통해 적을 발견하고 타격하는 전투방식을 택했다. 그러나 누가 민간인이고 누가 베트콩인지 알 수 없었고, 소탕했다고 생각한 지역에서 또다시 반격이 반복되었다. 정글을 모두 태우고 폭격해도 어디선가 베트콩이 나타났다. 이들은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총을 쏘고, 다음 날에는 다른 마을로 넘어가 장사꾼을 하고 밤에는 전투를 지휘했던 것이다. 상대적으로 약소국이고 전쟁무기도 현대화하지 못한 베트남 입장에서 게릴라(Guerrilla)전만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게릴라전은 전투보다는 저항의 방식에 가깝다. 숨어 있다가 야간에 기습하고, 붙잡히기 전에 사라지고, 보급로와 통신선을 끊고, 익숙한 공간에 함정을 파놓고, 인원이 적으면 물러나는 전쟁, 때로는 전투 그 자체보다 공포와 피로를 상대에게 안기는 전쟁 방식이다.
그러나 전쟁 초기 미군은 베트콩의 거점을 어디서도 찾지 못했다. 베트남의 게릴라전은 땅속을 거점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당시 사이공(Saigon) 북서쪽의 구찌(Cu Chi) 일대에서 가장 활발하게 게릴라전이 펼쳐졌다. 미군이 끝까지 점령에 실패한 지역이기도 하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때부터 프랑스에 저항하기 위해 베트남은 땅굴을 택했다. 처음에는 소규모 피난처 용도였지만, 무차별하게 폭격한 미국의 공습으로 인해 베트남은 지상이 아닌 지하를 거점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땅굴은 250km, 3층 구조의 지하 네트워크로 늘어났다.
땅굴은 단순 도피처가 아니다. 주방, 병원, 회의실, 탄약고, 침실 등은 물론 환기 시스템까지 갖춘 생활공간이자 하나의 지하도시였다. 지하에서 음식을 조리하면서도 미군의 공중 정찰이나 적외선 탐지를 피하기 위한 hoàng cầm stove라는 방식도 고안하였다. 배출되는 연기를 길게 분산된 굴뚝으로 유도하고, 굴뚝 통로 내부에는 수분을 머금은 나뭇잎이나 모래를 깔아 연기의 온도를 낮추는 방식이었다.
이러다 보니 수색작전을 펼쳐도 병력은 발견되지 않았고, 미국은 울창한 정글 자체를 모두 제거하는 작전으로 전환했다. 우선 소이탄(Napalm)의 강력한 화염으로 정글을 불태웠고, 일종의 제초제인 고엽제로 한번 더 확실하게 모든 식물을 초토화시켰다. B-52 전략 폭격기를 동원한 융단 폭격까지 감행한 후에야 수천 명의 병력을 투입해 땅굴의 일부를 발견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방대한 땅굴구조 전체를 파악할 수 없었고 여전히 일부 지역을 폭파하는데 그쳤을 뿐이었다. 미군은 땅굴 안에 직접 투입하는 'Tunnel Rats'라는 특수부대를 편성하기도 했지만, 어둠 속 터널 안에서 극심한 두려움과 스트레스는 물론, 수많은 함정과 기폭장치 때문에 높은 부상률 및 사망률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미군은 끝까지 이 땅굴을 제거하지 못했다. 엄청난 물량으로 폭격을 퍼부었지만, 땅굴 안에서 인내하며 은신하고 회피했던 베트콩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엄밀히 미국이 '패배'했다고 말하기 어려운 전쟁이지만, 세계 최강 미국이 구찌 지역의 땅을 뚫지 못해 철수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결국 베트남 전쟁의 상징이자, 고난을 견뎌낸 베트남 국민의 상징이 되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사용했던 다양한 함정들을 복원해 뒀다. 그 자체로 잔인했지만, 한편으로는 참 창의적이라는 생각도 지울 수 없었다. 흔하게 알고 있는 Punji pit에도 날카로운 창만 꽂아둔 것이 아니라 창 끝에 오물이나 독성 식물즙, 썩은 고기 등을 발라 상처가 심하게 감염되도록 유도하였고, Clipping armpit trap은 팔이 벌어지는 동작을 유도한 뒤 겨드랑이를 베거나 찔렀다. 미국의 Vietnam War Commemoration에 따르면, 1965년 1월에서 1970년 6월까지 사망자의 11%와 부상자의 17%가 이러한 함정들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에 더해 사망자와 부상자로 인해 후송과 의료부대의 부담이 급격하게 커지고, 전투병들의 불안감을 높여 사기를 저하시켰다는 점은 훨씬 더 큰 효과였을 것이다. 이처럼 심리전에서마저도 패배했을지 모른다.
구찌 땅굴 안은 더 놀라웠다. 초등학교 저학년생이나 편하게 다닐 정도로 실제 입구와 통로는 좁다고 느꼈지만, 관광객들을 위해 실제보다는 넓게 복원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관광객들의 출입을 허가하지 않은 땅굴 입구는 말할 수 없이 매우 협소했다. 복원해 놓은 약 20m의 짧은 구간만으로도 폐쇄감을 느낄 수 있었고, 휴대폰을 켜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방향감각도 상실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잠깐의 체험이었지만, 실제 여기서 생활한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흙더미와 벌레, 습기, 어둠, 공포심과 싸워야 했을 것이란 상상에 금방 숙연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지상은 더 위험했을 것이고, 결국 이 공간이 그들 본연의 삶의 터전이 되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밖에도 먹을게 부족해 주식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카사바(고구마와 비슷한 구황작물) 시식 체험, 당시 사용했던 AK-47과 M16 사격 체험, 전쟁용품으로 재활용하는 미군 포탄의 잔해 전시까지 다양하게 경험을 제공한다. 가슴 아픈 전쟁을 기억하는 공간이자 상업적 관광지로써도 훌륭하게 남겨뒀다.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점은 우리나라는 왜 이토록 부도덕한 전쟁에 참여했는가였다. 미국의 요구를 감히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전쟁 당시 전쟁자금도 병력도 부족했던 미국은 대한민국에 대한 경제 원조 축소와 주한미군 감축을 고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북한에 밀리던 한국에게 주한미군 감축은 큰 위협일 수밖에 없었고, 박정희 정부는 먼저 베트남에 병력을 보내주겠다고 제안하였다. 미국은 물론 수락했고, 한국 최초이자 최대 해외 파병이 시작되었다. 1964년에서 1973년까지 약 30만 명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였다.
한국군은 무엇을 남겼는가? 가장 최정예 군대를 보내기도 했고, 6.25 전쟁의 경험과 공산군 잔당을 토벌한 게릴라전 경험 덕에 한국군은 큰 성과를 냈다. 무엇보다 민심을 얻어야만 게릴라전을 승리할 수 있는 만큼 한국군은 참전기간 동안 대민 진료, 식량 제공, 태권도 보급까지 다양한 대민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쳐 현지인들의 민심을 얻었다. 이는 게릴라전 대응의 밑바탕이 되었다. 하지만 처절히 반성해야 할 점들도 있다. 첫째, 결국 부도덕한 전쟁에 참여한 침략자로서의 정체성이다. 우리나라의 경제적, 군사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명분 없이 타국의 전선에 뛰어든 것은 분명하다. 둘째, 한국군과 현지인의 결혼 및 한국군의 강간에 의해 태어난 2세 '라이따이한' 문제도 있다. 셋째, '퐁니·퐁넛 마을 학살 사건(Phong Nhi and Phong Nhat massacre)' 등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한 사례도 있으며, 2023년 2월 서울중앙지법은 해당 학살이 실재했음을 인정하는 판결이 내렸다.
1990년대 이후 김대중 정부와 문재인 정부는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한다는 입장을 베트남에 전달해 왔다. 하지만 베트남의 입장은 공고하다. 베트남이 승전국이기 때문에 어떤 사과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북베트남과 베트콩이 저지른 학살과 테러 등 연합군보다 더 심각한 비윤리적인 행위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진상조사를 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잘못도 줄줄이 엮어 나올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우리도 잘잘못에 대한 명확한 진상을 밝히지도 못하고 그에 상응하는 배상도 못하고 있다.
우리는 이 전쟁에 약 30만 명을 파병했고, 총 5,099명의 사망자, 10,962명의 부상자라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후유증이 남아있는 또다른 큰 문제도 있다. 바로 고엽제에 의한 피해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베트남의 정글을 초토화하기 위해 미군은 고엽제를 대량으로 살포했다. 베트남 산림의 약 5분의 1이 파괴되고, 수많은 논과 밭이 영구적으로 파괴되어 농작물 수확까지 급감했다고 한다.
더 큰 문제는 사람에게 닥친 문제였다. 1970년대부터 베트남 전쟁에서 복귀한 군인들은 원인 모를 질병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참전한 모든 국가에서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다. 하지만 미국과의 외교관계를 염두에 둔 우리 정부는 문제를 수면 아래로 가두었고, 1990년이 넘어서야 언론에 보도되며 사회적 이슈로 대두되었다. 결국 20여 년이 지나서야 원인 모를 질병의 이유가 고엽제였던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국가보훈부의 2024년 10월 기준으로 고엽제 피해자는 148,711명에 달한다. 후유증 2세로 분류된 피해자들도 211명이나 있다. 이들은 주로 폐암, 염소성 여드름, 버거병, 당뇨병 등의 후유증과 중추신경장애, 다발성신경마비, 동맥경화 등의 후유의증을 앓고 있으며, 후유증 2세들은 말초신경병, 하지마비척추병변 등의 질병을 겪고 있다. 부도덕한 전쟁으로 내몬 국가가 책임져야 할 소중한 국민들의 아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