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첫눈이 오던 날 풀어보는 겨울 이야기
오전 7시 52분. 겨우 뜬 눈을 비비며 일어나 커튼을 젖혔다. 김이 서린 창문 너머로 하얀 세상이 눈에 들어왔고, 이내 나는 탄성을 내질렀다. 왜요, 왜? 하며 작은 사람이 품으로 뛰어들었다.
저것 좀 봐, 첫눈이 내렸네! 작은 사람과 온기를 나누며 우리는 한 동안 창 밖의 하얀 풍경을 감상했다. 눈 놀이를 하자며 꾀어내 평소보다 이른 준비를 마치고 카메라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작은 사람은 쇠사슬을 짤랑이며 눈을 털어냈다. 그리고는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함께 밟자고 했다. 뽀드득.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눈의 감촉이 비로소 겨울이 되었음을 실감케 했다. 귀가 달린 귀여운 털모자와 패딩장갑으로 중무장을 한 작은 사람은 바닥에 쌓인 눈을 이리저리 흩어보았다가 크게 뭉치며 웃었다.
작은 사람이 세상에 나오던 날도 이렇게 눈이 많이 내렸다. 그래서인지 녀석은 유독 눈을 좋아한다. 꽃이 만연했을 어느 봄날 태어난 나는 이유도 없이 눈을 좋아하는데, 이 녀석을 만나려고 그랬나 싶기도 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어린이집까지 걸어가는 길이 하염없이 내린 눈에도 불구하고 포근하게 느껴졌다.
작은 사람과 인사를 하고 숲으로 향했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발이 푹푹 잠길 정도로 쌓인 눈은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부츠를 신었음에도 자꾸만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럼에도 씩씩한 걸음으로 발자국을 꾹꾹 찍으며 숲을 향해 걸었다. 드디어 도착한 숲은 다니는 사람이 없어 고요했다.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이따금 부는 바람에 사라락하고 눈이 떨어지는 소리와 지저귀는 새소리뿐이었다. 뽀득뽀득 눈을 밟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릴 정도의 고요함이었다.
항상 다니던 산책길은 이미 눈 아래 파묻혀 사라졌고, 미처 지지 못한 단풍 위로 내려앉은 눈은 생경한 풍경을 만들어냈다. 가을 위에 덧씌워진 겨울은 평생 본 적 없는 풍경이었다. 낯설고도 아름다운 그 숲에 한참을 머물러 눈으로 먼저 담고, 사진으로도 담았다. 남은 카메라 배터리는 두 칸뿐이었다. 조바심이 났지만, 내가 그 풍경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내 마음이 평온해졌다.
숲의 가장 깊은 곳에 다다라 원 없이 눈을 즐기고 다시 올라오는데 길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괜찮은 기분이 들었다. 길은 여기 어디엔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폭신하고 하얀 눈을 좀 더 즐기고 싶었다. 나는 그 상황에서 다시금 인생을 보았다.
목표를 향해 달리는 경주마 같았던 나는 언제나 미래에 가 있었다. 가끔은 흘러간 과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기도 했다. 그로 인해 늘 현실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가야 할 길은 이미 준비되어 있고, 눈을 즐기듯 그렇게 현재의 나를 사랑하며 즐기면 될 일이었다.
정말 좋다.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끊임없이 혼잣말을 되뇌며 깨달았다. 그래, 나는 이토록 겨울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지. 겨울은 뼈가 시리게 춥고 깜깜하지만은 않았다. 이렇게 눈부시게 하얗고 반짝이는 눈이 있었는데, 그동안 마음 안에 여백을 남겨두지 않았던 탓에 나는 내가 좋아하는 계절도 잊고 있었다. 그렇게 눈 내린 숲을 한 바퀴 돌면서 오래도록 잊고 있던 나를 되찾았다.
7년 전 겨울, 눈 소식을 듣고 여행메이트 J와 함께 강원도로 여행을 떠났다. 첩첩산중은 분명 이런 풍경을 두고 하는 말일 거야.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설산 사이를 달렸다. 차 안에는 영화 'Love Letter'의 OST가 흐르고 있었다. 인제 자작나무숲으로 가려면 1시간 정도의 산행을 해야 했다. 가방 가득 달콤한 간식거리를 챙겨 온 J와 카메라 장비를 챙겨 온 나는 파이팅을 외치며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 사이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자작나무숲까지는 생각보다도 더 오래 걸렸다. 초콜릿바를 입에 넣고 오물거리다가 기분이 좋아진 우리는 아주 오래된 영화 'Love Story' 속 주인공처럼 눈 위에 드러누웠다. 푹신한 이불 같은 촉감에 꽤나 오랜 시간 누워있었던 기억이다.
드디어 도착한 자작나무숲은 세상의 모든 색이 사라진 것처럼 하얗기만 했다. 이국적인 풍경에 우리는 연신 예쁘다! 를 연발하면서 많은 사진을 찍었다. 그때의 나는 빨간 머리였는데, 그래서 더욱 그 풍경에 잘 어울렸던 것 같다.
자작나무숲을 떠나 월정사로 가는 길에 우리는 또 하나의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었다. 산행으로 몹시 허기가 진 상태여서 점심을 먹기로 결정하고 식당을 찾던 그때,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허겁지겁 주차를 했는데, 안타깝게도 식당은 문을 닫은 상태였다. 배고픔에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은 탓이었을까. 차는 가득 쌓인 눈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외투도 벗어던지고 뒤늦게 타이어체인을 걸어보려고 했지만 헛수고였다. 어디선가 나뭇가지를 주워와 타이어 주변의 눈을 치워도 보고, 손으로 파보기도 했으나 해결될 리가 없었다. 결국 긴급출동 서비스로 기사님을 호출했고, 우리는 기사님이 도착할 동안 차 안에서 기다리며 어이가 없어 웃음만 터뜨렸다. 나는 호기롭게 말했다. 나중에는 분명 이게 다 추억이 될걸? 제일 기억에 남는 순간일 거야. 그리고 정말 그렇게 되었다.
무사히 눈밭에서 빠져나와 어디서 밥을 먹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느 카페에 들러 커피를 한 잔 하고, 저녁에는 속초 중앙시장에서 안주로 닭강정을 사서 맥주를 마셨던 기억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전에 들렀던 오대산 전나무숲길의 한적한 분위기에 취해 한껏 뛰어다니다가 눈사람을 만들던 장면도 선명하다.
그 겨울 여행을 가겠다고 튼튼하고 따뜻한 털부츠를 샀던 7년 전의 나는 매우 해맑았다. 첫눈이라기엔 과하게 많은 눈이 내린 오늘, 나는 그때 한 번 신고 계속 보관만 하던 부츠를 다시 꺼내 신었다. 겨울을 좋아하던 나를 다시 찾게 된 것은 그때의 내가 보낸 선물이었을까. 덕분에 맑은 마음으로 지금의 나를 꽉 안아줄 수 있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와 창문을 바라보니 그새 눈이 내리고 있었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자연과의 깊은 교감으로 가뿐하고 충만한 기쁨을 얻은 뒤에, 차이티를 우리고 따끈한 스팀 우유와 꿀을 넣어 차이티라테를 만들었다. 손에 느껴지는 온기만큼 마음의 온기도 채웠다. 덕분에 올 겨울은 따뜻하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