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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는 '점' 하나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구은재라는 시작점과 민소희라는 종점에 대하여

by 리온



'점'만 찍었는데 아무도 몰라본다는 막장 드라마, <아내의 유혹>.

파격적인 전개와 동시에 수많은 짤을 생성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 유명한 그지짤. 나름 남주...


나를 지금 바보로 아는 거↗야↘!


도대체





여기서 무엇보다 유명한 것은 단연 민소희.

하지만 드라마를 끝까지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그가 단순히 '점'만 찍은 건 아니라는 것을.






part 1. 변장


대부분이 아는 사실은, 착하기만 한 구은재가 불륜남인 자신의 남편과 불륜녀인 그의 절친에게 복수하기 위해 눈 밑에 점을 찍고 민소희라는 사람인 척 행세한다는 것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구은재는 눈 밑의 점 외에도 머리를 자르고, 덧니도 교정했다. 하지만 이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스타일의 변화 정도다.

아래의 목록은 구은재가 외적으로 바꾼 것들의 목록이다.


(위의 것들 제외)

다이어트

몸의 모든 점 제거

금니 모두 치아 색으로 변경

말투, 목소리 변경

검은색이던 손톱을 뽑음. 원래의 피부색으로 자라나도록 함.

복수 과정 중 허벅지에 화상 입음. 그러나 치료받지 않고 '민소희'의 원래 화상자국이라고 이용.



당신의 주변 상황이라고 가정해보자. 직장 동료 혹은 친한 친구가 신년을 맞아 올해는 꼭 바뀌기로 했다며, 다이어트를 시작했다고 하는 것이다.

점심은 샐러드로 때우고, 회식도 일절 가지 않는다. 이 정도는 납득할 만한 수준일 것이다.


살을 어느정도 뺀 동료/친구는 이 참에 신경 쓰였던 점들을 몇 개 빼겠다고 한다. 당신은 그렇구나, 고개만 끄덕인다.

추진력을 얻은 그는 예전에 했던 금니도 원래의 치아 색으로 바꾸고 싶다고 한다. 살짝 의아하긴 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고개를 끄덕인다.

다음 날 당신의 옆자리에 앉은 동료, 혹은 약속장소에서 만난 친구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와 말투로 당신에게 인사한다. 슬슬 당신은 그가 '과하다'고 느낀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다른 손톱보다 어두웠던 새끼 손톱을 뽑겠다고 한다. 이제 당신은 인상이 찌푸려진다. 어쩌다 그가 뜨거운 물을 쏟아 허벅지에 화상을 입자, 그는 아파하긴 커녕 오히려 기뻐한다. '새로운 나'의 표식이라는 것이다.



어떤가? 후반으로 갈 수록 당신이 알던 그와는 확실하게 다르지 않나?

하지만 당신이 그에게 거리감을 느끼는 것은 단순한 외적인 변화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구은재의 주변 반응도 당신과 비슷했다.

몇 십년간 그를 봐왔던 지인들은 여전히 그가 '구은재'라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아무리 그 스스로가 '민소희'라고 얘기해도, "그러기엔 너무 은재랑 닮았잖아?"라는 반응이 주였다.





part 2. 변화


이제 좀 다른 걸 추가해보자.


당신의 동료/친구는 돌연 퇴사를 한다. 요리를 하고 싶었다며 어느 장인의 제자로 들어가겠단다.

뿐만 아니라 미뤄뒀던 자기계발을 해야겠다며 온갖 취미 클래스에 등록을 한다.


한동안 연락이 끊겼던 그. 오랜만에 만나보니 분명 얼굴은 똑같은데, 낯선 느낌이 든다.

감수성이 풍부하던 친구는 이제 감동적인 이야기를 무표정한 눈으로 응시한다.

당신과 자주 가던 백반집과 카페는 한 번도 간 적이 없다는 듯 스쳐 지나 가고, 생전 처음 보는 파인 다이닝에 예약을 해 두었다고 한다.



당신은 이제 그가 '예전의 친근했던 그'가 아니라고 느낀다. 수백 번도 더 봤던 얼굴이지만 거리에 스쳐가는 행인 1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미대를 졸업했던 은재는 원래 메이크업 샵을 차릴 생각이었다. 남편과 시댁에 발이 묶여 쥐죽은 듯 살아야 했을 뿐. 그러나 그는 복수를 하기 위해 옛 소원대로 공모전에 도전하고, 대상까지 탄다.

그 뿐만이 아니다. 물 공포증이 있었던 은재는 수영을 마스터하고, 5개 국어를 거뜬히 하며, 승마, 골프도 꾸준히 해 왔던 것처럼 연습한다. 춤과 담 쌓았던 몸치였지만 부던한 노력으로 탱고까지 섭렵했다.

복숭아 알러지? 눈속임으로 모자라면 약이라도 먹어서 없는 척 하면 된다.


게다가 '민소희는 강남 뷰티샵 사장의 딸'이라는 신분정리까지 완벽하게 된 상태. 아무리 주변인이 그에게 은재라고 해도, 사장이 나서서 내 손으로 키운 딸이라고 하는데 뭐라고 하겠는가.




이런 노력에도 주변인들은 끊임없이 그를 의심한다. 신상을 캐고 졸업 증명서를 찾으러 다녔다. 뭐라도 있겠지. 그가 구은재라는 증거가.

예를 들면 그의 변할 수 없는 착한 성품과 같은 것 말이다.

평소 자신의 엄마만 보면 눈물을 흘릴 정도로 여렸던 은재, 아니 민소희는 이제 엄마의 얼굴을 봐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남을 보는 듯한 시선, 차가운 표정이 그가 내보이는 전부다.




이제 온갖 집안일을 하던,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꼬박꼬박 밥을 차려주던, 모진 말과 손찌검에도 고개만 숙이던 구은재는 없다. 똑 닮은 얼굴에 '점'이 있는, 민소희가 있을 뿐.






part 3. 복수의 성공은 새로운 삶과 함께


맨 처음에 적었듯 원래 이 드라마는 복수극이다.

다른 여자와 놀아난 남편에게, 자신을 배신한 친구에게 하는 복수.


남편이 좋아하는 식으로 머리를 잘랐어도, 평소와 다른 옷을 입었어도, 심지어는 못생겼던 손톱을 뽑았대도 그는 여전히 구은재였을 것이다. 새로운 스타일은 남편의 이목을 잠깐이나마 끌었을 지 모른다.


그러나 은재는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얘기했다.

할 줄 아는게 많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랬다.


그가 선택한 말들은 세 가지.

"할거예요", "해보겠습니다", "해볼게요".


은재는 복수를 위해 잠시 변장한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는 변화하고 있었다.

철저한 복수의 과정은 그를 나약한 과거에서 몰아내고, 당당한 자신만을 허락하도록 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끝까지 자신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얼마나 닮았으면 보는 사람마다 구은재라는 사람이라고 하죠?"





그래서 그는 남편과 친구를 포함한 주변인들을 감쪽같이 속이는 데 성공한다.

어쩌면 자신마저도.








맺음말. '점'을 찍는 사람들에게



시작점만은 무수히 많이 찍어본 사람들이 말한다. '구은재는 점만 찍고 민소희인 척 한다'고.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모른다. 그 점은 민소희가 구은재라는 인생을 버리고 찍는 마침표였다는 것을.


어쩌면 당신도 그러고 있을 것이다.

물은 어렸을 때부터 무서워한다며, 춤은 출 줄 모른다고 손사래를 치며, 누군가의 손가락질에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며.


이제 마침표를 찍어보는 건 어떤가.

매년 했던 신년 다짐에. 매번 했던 의미 없는 사과에. 매일 했던 자책에.



누군가 아무리 당신을 '구은재'라고 해도 상관없는 '민소희'가 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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