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교 수필
이 글은 학교 가는 버스에서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과, 시지프 신화의 앞부분 약 100페이지 가량을 읽고 느낀 점을 적어낸 글입니다.
시지프 신화는 모두 읽고 감상을 남기기엔 나의 철학적 사유의 힘이 부족하기도 하고, 다 읽을 때쯤이면 앞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을 듯하여 중간정리을 하도록 하려고 합니다.
참고로 필자는 니체, 사르트르, 야스퍼스 등이 주창했던 실존주의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족한 상태이며, 그저 카뮈의 글을 읽고 받은 감상을 남기고자 함을 미리 알립니다.
우선, <이방인>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이방인>의 주인공인 뫼르소는 어딘가 제3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삶을 관조하는 태도를 소설 내내 보입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소식에 그것은 나의 잘못은 아닙니다라고 말하기도 하고, 관을 닫기 전에 어머니의 얼굴을 보지 않고,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슬픔보단 장례식 날의 뜨거운 태양이 뫼르소를 괴롭게 할 뿐입니다.
4발의 총알로 사람을 죽인 이유에 대해 물었을 때에도 뫼르소는 '모두가 태양 탓이다'라고 말해 버립니다.
여자친구인 마리와의 행복한 감정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대조를 이루고,
장례식과 살인을 저지른 날(죽음이 일어난)의 뜨거운 태양빛은 볕이 들지 않는 감방(죽음을 기다리는)의 어둠과 대조를 이룹니다.
처음 <이방인>을 읽으며 내내 느꼈던 감정은, 뫼르소의 감정을 당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슬퍼야 할 것인데 그렇지 않고, 여자친구와 함께하니 행복해야 할 것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을 죽였으니 죄책감을 느껴야 할 것인데 그렇지 않고, 자신이 죽게 되었으니 슬퍼야 할 것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뫼르소는 그냥 인생을 살기를 포기한 것이 아닌가 하는 태도를 소설 내내 보여줍니다.
여러 차례 다시 <이방인>을 읽으며 알게 된 것은, 카뮈가 뫼르소의 이러한 감정 상태로 우리에게 부조리를 설명하고자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행복과 슬픔, 빛과 어둠, 삶과 죽음의 사이에서 오는 차이가 인간에게 부조리를 가져오고,
그 부조리와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이방인>에 대한 더 깊은 이해는, <시지프 신화>를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시지프 신화 - 알베르 카뮈
참으로 충격적인 <시지프 신화>의 첫 문장입니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이른바 살아갈 이유라는 것은 동시에 목숨을 버릴 훌륭한 이류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라는 심오하고도 답이 없는 질문에 대한 적절한 대답이 될 수도 있을듯합니다.
삶에 찾아오는 수많은 고통과 시련을 견뎌내면서까지 굳이 살아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굳이 살아가는데 이토록 고통스러워야만 하는가,
삶의 의미란 대체 무엇일까? 하는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질 때,
"그렇다면 자살을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을 해보면 좋을 듯합니다.
우리가 삶을 살며 고통스러운 이유는 다양합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공부를 하는 것이 힘들기도 하고,
더 좋은 몸을 위해 하는 운동이 우리를 괴롭게 하기도 합니다.
부유한 미래를 위해 포기해야 하는 지금의 직장 생활 또한 괴롭습니다.
외롭지 않기 위해 유지하는 인간관계가 때론 우리를 절벽으로 밀어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련들이 찾아오는 이유는 한 가지 공통된 이유를 지녔습니다.
바로 '위대한 삶, 즉 발전된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위대한 삶이란 달리 거창한 말이 아닙니다.
지금 처한 현실보다
더 나은 미래
더 좋은 몸
부유한 경제 상황
외롭지 않은 인간관계
모두 지금의 나보다 더 나아진 나의 모습입니다.
더 나아진 나의 모습을 '이상향'이라고 한다면,
이 이상향과 나의 현실의 간극이 우리를 고통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이 간극이 우리에게 주어진 부조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조리를 받아들이고, 지금 처한 현실에 안주하고 살아가면 고통에 처할 일은 없어 보입니다.
어두운 미래
그저 그런 몸
발전 없는 경제 상황
노력하지 않은 인간관계
이들에 둘러싸여 살기를 원한다면 별다른 고통은 없지 않겠습니까?
카뮈는 "그렇다면, 그냥 자살을 하는 것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말합니다.
카뮈가 말하는 자살은 그런 의미에서의 자살인 듯합니다.
카뮈는 인간이 이 부조리에 저항하여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부조리에 순응하고 자살과 다름없는 삶을 살아는 것이 아닌,
부조리를 인식하고 그에 열렬히 반항하여 사는 것이 삶임을 주장합니다.
그 예시로 신의 형벌을 받아 바위를 산 위로 끝없이 밀어올리는 시지프의 이야기를 합니다.
바위를 밀어올리는 힘든 행위를 멈추고 죽음을 맞이하는 대신,
죽음에 이를 때까지 신에 저항하여 끝 없이 바위를 굴려 올리는 것이 인간의 삶과 닮아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카뮈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는 것, 그것은 정신적 침식으로 골병이 들기 시작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냥 자살하지 않고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렇게 고통스러울 바에 자살하는 것이 나은 것은 아닌가?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
라는 의문을 던지는 순간 부조리의 인지는 시작되고, 끝없는 정신적 사유에 골병이 든다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 행복과 슬픔, 이상향과 현실, 빛과 어둠의 절대 좁혀지지 않는 부조리에 반항하여 삶을 살아내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고 이해해 보자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듯합니다.
삶을 사는 것 자체가 절대 완전히 극복해 낼 수 없는 부조리에 반항하는 것이기 때문에, 죽기 직전까지 고통을 이겨내다 죽음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졸업만 하면, 입학만 하면, 취업만 하면, 결혼만 하면, 자식 대학만 보내면, 얼마 만 모으면, 집만 사면, 60세만 되면 같은 우리의 소망들은
부조리에 대한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반항이며, 삶에 대한 당연한 자세였던 것입니다.
산다는 것은 곧 부조리를 살려 놓는 것이다. 부조리를 살린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부조리를 주시하는 것이다.
에우리디케의 경우와는 반대로,
부조리는 오직 우리가 그것을 주시하던 눈길을 딴 데로 돌릴 때 죽어 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유일하게 일관성 있는 철학적 태도는 곧 반항이다.
부조리에의 반항을 역설한 카뮈입니다.
삶 자체가 고통이고, 이것을 견뎌낸다는 불교의 가르침과도 결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렇듯 부조리에의 반항을 역설했던 카뮈가 시지프 신화를 집필한 후엔 부조리를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았으며,
부조리주의 철학자로 여겨지는 것을 후회했습니다.
어떠한 이유로 그러했는지, 부조리의 의의는 무엇인지 등은
시지프 신화를 마저 다 읽은 후에야 생각해 볼 수 있을듯합니다.
삶이 너무 힘들다거나,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힘든 사람이라면
<이방인>과 <시지프 신화>를 연달아 읽어 보는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삶의 의미를 찾는 데에도, 삶의 고통을 이해하는 데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임을 의심치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