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기대는 죄였을까요.
나이가 들수록 인생은 허무함, 공허함과 싸우고 이겨내며 버티는 거라고 어디선가 본 적이 있습니다. 8화에서 '기대하는 건 죄가 아니다'라고 잔뜩 기대했던 저의 기대는 죄였어요. 저는 기대를 보상받지 못했습니다. 안 속상하려고 노력했는데, 허탈해서 그날은 퇴근하고 그냥 바로 잤습니다. 거의 13시간은 잔 것 같아요. 저는 너무 기대했나 봐요. 그래도 며칠 지난 지금은 잘 회복 됐습니다.
아무래도 기대의 허들을 낮춰야 할 것 같아요. 기대하되, 기대로 너무 들떠서 일상이 어그러지지 않을 만큼만, 기대가 이뤄지지 않아도 금방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만 기대하기. 왜냐하면 비록 제 기대가 이뤄지지 않았지만 저는 여전히 '기대는 죄가 아니다'라는 말을 좋아하니까요.
기대함으로써 들뜨는 삶, 그로 인해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허무함과 공허함. 기대가 죄라면 이 허무함과 공허함을 잠시나마 잊을 들뜸조차 죄책감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잖아요. 그러니까 기대는 죄가 아니에요. 저는 지금 허들을 좀 낮춘 기대는 죄가 아니라고 저에게 말해주는 거예요. 그렇게 저를 북돋고 있는 거예요.
저는 고향을 떠나 타지에 산 지 꽤 됐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말이에요. 대학부터 다른 지역으로 진학했으니 혼자 산 지가 10년이 다 되어갑니다. 그렇지만 대학 땐 타지에 사는 게 외로운 지 몰랐어요. 그때는 눈만 돌리면 친구들이 있었으니까요. 직장 때문에 타지에 오게 되어서야 알았습니다. 타지에 홀로 사는 건 아주 아주 외로운 일이라는 걸요.
그래도 나름 내향형 인간이라 집 안에 있으면서도 시간을 잘 보냈어요. 그런데 그것도 한계가 있었나 봅니다. 저의 우울증은 주변 상황과 자신감 하락과 외로움으로 터져버렸거든요. 생각해 보니 우울로 인해 처음 신체 증상이 빵! 하고 터졌을 즈음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반년은 가족도, 친구도 만나지 않고(물론 전화나 카톡 정도는 했지만요) 혼자 지냈던 것 같습니다.
올 하반기에는 가족들의 케어와 함께, 또 어쩌다 보니 친구들을 이전보다 자주 만나고 있습니다. 어제는 서울에 올라가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잔뜩 느끼고 왔어요. 사실 크리스마스 분위기에는 별로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친구들과 직접 만나 웃고 떠드는 건 좋았어요. 사람은 역시 혼자서 살 수는 없나 봅니다.
제가 기대를 다시 죄로 생각하지 않고, 대신 기대하되 기대의 허들을 낮추겠다고 했잖아요?
어제 만난 제 친구는 '노잼 시기'를 보내고 있어요. 일도, 연애도, 일상도 재미가 없대요. 그런데 어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잔뜩 머금은 카페에서, 처음 보는 투명필름을 찍는 네컷사진점에서도, 따뜻한 국물이 일품이었던 쌀국수 집에서도 "너무 좋다.", "너무 행복하다."라고 자꾸만 말하더라고요. 요즈음은 아무것도 재미가 없다며 아예 차라리 노잼 시기를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던 친구가 어떻게 이렇게 자꾸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나는 허들이 낮아. 난 그래서 조금만 행복해도 행복해. 근데 조금만 짜증 나도 빡쳐."
뒷말이 웃기긴 하지만 생각해 보면 조금만 행복해도 행복이잖아요? 큰 것만 행복은 아니잖아요?
저는 허들이 높아요. 그래서 남들이 칭찬하는 제 모습도 정말 칭찬거리가 맞나 의심하곤 했어요. 그런데 이 친구 얘기를 듣고 그냥 제가 가진 것의 모든 허들을 낮춰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맞아요, 이제는 피곤하게 살고 싶지 않아요. 그냥 조금만 행복해도, 조금만 짜증 나도, 조금만 기대되어도 '이만큼 밖에 안 되는 감정으로 입 밖으로 말해도 되나?'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표현할래요. 그래도 아무것도 문제 되지 않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