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다니까요" 우울하다는 말이 대화의 시작이 되어버린 요즘. 함께 무기력함을 열띠게 호소하다 회사 동료가 나에게 운동은 하고 있냐고 물었다. 코로나 탓에 운동시설, 카페를 비롯한 서울의 모든 활력시설들이 멈춰버렸다. 집에서 매일 요가를 하려한다 하니 쑥쓰럽게도 대단하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스트레칭이나 하는 거라고 얼버무리며 속으로 한마디 말을 삼켰다.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걸요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무게가 어느 만큼인지에 무감각한 사람이다. 안타깝게도 능력 이상의 무게를 마다하지 않는 무모함도 지녔다. 예전에는 이런 내 모습이 큰 장점이라고만 생각했다. 실제로 앞뒤 가리지 않는 내 집념이 예상 밖의 성과로 돌아오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입시의 무게가 엄마에 대한 원망으로, 버거운 업무의 무게가 상사에 대한 원망으로 나타나면서 나를 되돌아보게 됐다. 내 만족이 아니라 타인의 인정에 고파 내 몸과 마음을 혹사시켰던 건 아니었을까.
지난해 겨울 에어비앤비를 통해 경험했던 '해녀와의 대화'. "욕심내지 말고 숨만큼만 있다오라"는 말을 매일 들었다던 여든여덟 할머니의 말씀이 내게도 교훈이 됐다.
사람이란 잘 변하지 않아서, 최근에도 물밀듯이 밀려오는 업무를 하나씩 쳐내고는, 울먹거리며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온 참이다. 투덜대다가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요가 매트를 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어본다. 빳빳해진 목근육과 팽팽해진 관자놀이, 틀어진 자세를 바라보며 조금씩 균형을 맞춰간다. 나에게 무심했던 시간이 길수록 다시 나에게 집중하기까지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 내가 이만큼이나 또 무심했네, 하고 새삼 깨닫는다.
요가를 마치고 메모장에 기록해둔 '최선'이라는 내 삶의 1원칙을 '할 수 있는 만큼만'으로 바꿔 적었다. '최선'이라고 되새기지 않아도 어차피 난 끙끙대며 주어진 무게를 소화해내려는 사람이기에, 조금 '내려놓는 일'에 방점을 뒀다. 사람들의 마음 생김새 또한 모두 달라서 내 마음의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 지를 먼저 알아야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끊임없이 내 몸과 마음의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하는 일, 그것이 열심히 살아가는 일이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