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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독서신문 May 11. 2020

틀린 말은 없지만… 비정하고 무정한 ‘지식인의 언어’

[사진=연합뉴스]

지난달 29일 경기 이천에 있는 한 물류창고 건축공사장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총 서른여덟명이 숨지는 참극이 벌어졌다. 현재 화재 원인을 찾기 위해 경찰과 소방 등 여러 유관기관이 합동 감식을 실시하고 있다.


근데 불길은 화재 현장에서만 일어난 건 아니었다. 이번 이천 화재(火災)의 화제(話題)는 바로 여권의 유력 대선주자인 이낙연 전 국무총리였다. 지난 5일 이 전 총리는 이천 물류창고 화재 참사 합동분향소에서 유가족들과 ‘때 아닌’ 설전을 벌였다.


이 전 총리가 분향소에 등장하자 한 유가족은 “어떤 대책을 갖고 왔느냐”고 물었다. 이에 이 전 총리는 “현직에 있지 않다. 국회의원이 아닌 조문객으로 왔다”고 답했다. 유가족이 “장난하느냐”고 격분하자 이 전 총리는 “장난으로 왔겠느냐”고 맞받아쳤다. 이 전 총리의 대답에 어느 유가족이 “유가족들 모아놓고 뭐하는 짓이냐”라고 외치자 이 전 총리는 “내가 모은 게 아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분향소를 떠났다.


이 전 총리의 말에는 사실이 아닌 게 없다. 이 전 총리는 ‘전직 총리’이자 ‘국회의원 당선인’으로서 아직은 아무런 권한이 없다. 관료도, 의원도 아닌 이 전 총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의 말대로 “조문객의 심정”으로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유가족들의 아픈 마음을 위로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 전 총리는 자신의 순수한 의도와는 달리 유가족들의 질타를 들어야만 했다. 그는 결국 “자신의 수양 부족”이라며 사과했다.


JTBC 프로그램 '77억의 사랑'에 출연 중인 김희철씨 [사진=JTBC]

결은 다르지만 하나의 사례가 더 있다. 최근 칼럼니스트 위근우씨와 방송인 김희철씨 사이의 설전이 그것이다. 김씨는 한 방송에서 친한 동료였던 故 설리씨와 故 구하라씨의 죽음을 언급하며 “요즘 솔직히 성별을 갈라서 싸운다. 남자들은 성희롱으로 두 친구들에게 모욕적인 말을 하고, 여자들은 ‘여자 망신이다’부터 또 모욕적인 말들을 하다가… 그러다가 두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며 “(두 친구의 죽음 이후엔) 이제 서로 탓할 거리를 찾고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위씨는 “이걸 ‘성별 간 갈등’ 문제로 치환해 둘 다 잘못이라고 말하는 건 엇나간 판단이라는 생각(이 든다)”며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남성 악플러 여성 악플러 둘 다 잘못한 것은 맞지만, 그 근거로부터 ‘성별 간 갈등’에서도 남녀 둘 다 잘못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 것은 논리적 비약”이라고 김씨의 말을 반박했다.


위씨에 따르면 두 여성을 죽음으로 몰고 간 근본 원인은 “여성을 대상화하고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지 않는 남성중심적이고 여성혐오적 세계관으로부터 비롯”한 것이다. 하지만 김씨가 그들의 죽음을 단순히 ‘성별 간 갈등’의 문제로 치환해버림으로써 사안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위씨의 지적이다. 페미니즘이라는 거대 담론에서 볼 때, 위씨는 적어도 논리로는 김씨를 압도했다. 하지만 이후 위씨는 자신의 SNS에 “부당한 권위를 행사하는 비정한 지식권력이 됐다”며 당분간 SNS 활동을 쉬겠다고 선언했다.


위 사례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이 전 총리와 위씨는 우리 사회의 지식인이다. 두 사람 모두 글과 말을 다뤘던 기자 출신이다. 그 누구보다 언어사용의 전후맥락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하는, 다시 말해 듣는 이가 처한 상황적 조건에 맞게 잘 이야기할 줄 알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사실과 논리를 무기 삼아 자신에게로 향하는 비난을 방어하는 데 급급했고(이 전 총리), 상대의 처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작정 자신의 가치와 신념을 관철시키려 했다(위씨). 이는 분명 사려 깊지 못한 행동이다.


이 전 총리는 총리 재직 당시에 논리적인 언변으로 국민들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위씨는 한국의 폭압적인 남성중심사회를 여성주의 관점에서 날카롭게 비판한 보기 드문 남성 지식인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지나치게’ 정연(整然)한 논리가 사랑하는 가족과 동료를 잃고 슬픔에 빠진 사람들의 마음을 다시 한번 아프게 했다. 즉 두 사람은 옳은 말을 했지만 그들의 의도와는 다른 상황을 낳았다. 안타까운 일이다.


책 『언어인간학』의 저자 김성도는 “언어는 의사소통을 위한 객관적 도구에 머무르지 않고 언어사용을 통해 정신적 성장을 이룰 수 있어야 하고, 사유하는 능력을 기르며 정신의 얼개를 짜고, 감각, 감정, 욕망, 꿈으로 이뤄지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형성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저자의 논의처럼 제대로 된 언어사용은 단순히 소통의 도구로만 머무르지 않고, 한 인간을 지적·정서적·윤리적 차원에서 성장시키는 기능을 한다. 때로는 사실과 논리에 기반을 둔 ‘논쟁’보다 고통에 처한 인간의 내면을 그저 묵과하고 바라볼 줄 아는 따뜻한 ‘시선’이 필요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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