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신문 김승일 기자] “태양은 내 등을 포근하게 데워주고, 공기는 꽉 막혔던 나의 혈을 뚫어주는 것 같았다. 하와이의 땅은 내 두 다리의 중심을 단단하게 세워주어, 내가 살아 있는 생명체라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웬만한 길은 걸어 다니며, 걷기가 취미라는 배우 하정우는 책 『걷는 사람, 하정우』에서 만약 인생에서 마지막 4박6일이 주어진다면, 하와이에 가서 계속 걷겠다고 말한다. 하와이의 덥지도 습하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와 깨끗한 자연 풍광에서 그저 걷고, 먹는 것이 그에게는 최고의 호사다.
당신에게도 걷고 싶은 ‘하와이’가 있는가. 덥지도 습하지도, 춥지도 않은 가을은 어느새 9월의 끝을 향해 달리고 있다. 걷기 딱 좋은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하늘은 높고 맑다. 여름내 열기로 뜨거웠던 길에는 사람들의 발소리와 말소리가 가득 찬다. 바야흐로 앉아있기보다 걷기가 더 기분 좋은 시기. 문제는 장소인데, ‘하와이’만큼 풍광이 좋은 곳은 우리나라에도 많다. 바다와 땅, 그리고 가을 하늘이 어우러진 전국의 걷기 장소를 소개한다.
매월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추천하는 걷기 여행길 중에서 으뜸은 9월의 길이 아닐까 한다. 한국관광공사가 이번 달 추천한 길 다섯 곳 중에서도 특히 강원도 고성의 해파랑길이 매력적이다. 이곳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북쪽 길’을 연상시키는 길이라고 알려졌다. 부산에서 고성까지 770km 푸른 동해를 끼고 이어지는 이 길은 가을 하늘과 어우러져 걷는 자에게 무한한 상쾌함을 토해낸다. 해안길을 따라 걷다 보면 만나는 청간정, 청학정을 비롯해 다양한 문화유적지와 송림, 해안절벽은 멋을 더한다.
“이토록 초현실적인 빛깔의 하늘이라니. 나는 머리 위에 노을을 모자처럼 얹고 걷고 또 걷는다.” 하정우는 하와이의 ‘매직아워’(여명기나 황혼기에 햇빛의 양이 적당해서 아주 아름답고 부드러운 영상을 찍을 수 있는 시간대)를 예찬한다. 그러나 ‘매직아워’로 유명한 곳은 우리나라에도 있다. 경기 화성시 서신면 제부리에 딸린 섬 제부도다. 배를 타고 맨 처음 닫는 선착장에서부터 낙조 전망대를 볼 수 있다. 그러나 꼭 이 전망대에서 낙조를 봐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선착장에서부터 이어지는 900m 길이의 해안데크 산책로 어디서든 서해로 떨어지는 해를 볼 수 있다. 앉아서 석양을 감상할 수 있는 의자나 사진이 잘 나오는 포토존이 있으니 참고하자.
좀 더 이국적인 풍광을 원한다면 경북 경주 하서리와 읍천리 사이 몽돌해변 주변 ‘주상절리 파도소리길’을 걸어보자. 2천만년 이전에 화산폭발로 인해 형성된 주상절리가 해변 곳곳에 무심하게 널려있다. 특히 이곳은 밤에 걸어도 좋다. 2km 정도 길게 늘어서 있는 조명이 밤길과 함께 바다를 비춘다. 파도가 주상절리를 쓸어내리고 몽돌해변의 몽돌(모가 나지 않고 둥근 돌)을 움직이는 소리에 집중해 보자.
야자수가 있는 하와이 해변의 화려함보다 소박하지만 정갈한 우리의 멋이 좋다면 변산으로 가자. 혹 이준익 감독의 영화 <변산>을 봤다면, 두 주인공(박정민과 김고은)이 앉아서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 바다가 이곳에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이 조선 8경 중 하나였으며, ‘변산삼락’(변산에는 맛, 풍경, 이야기가 있다)이라는 말도 있다. 해변을 따라서는 어디나 걷기 좋으나 ‘변산마실길’ 5코스 ‘모항갯벌 체험길’을 권한다. 솔섬에서 시작해 산림휴양림, 모항해수욕장, 모항 갯벌체험장으로 이어지는 이 길의 끝에는 모항이 있다. “모항에 도착하면/바다를 껴안고 하룻밤 잘 수 있을 거야/(중략)/걱정하지 마, 모항이 보이는 길 위에 서기만 하면/이미 모항이 네 몸속에 들어와 있을 테니까”(「모항으로 가는 길」)라고 안도현은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