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인문학
십여 년 전 월드오브워크래프트(World of Warcraft 2004년에 국내 첫 서비스를 시작한 게임으로 스타크래프트와 함께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의 간판 게임으로 유료로 서비스된다.)로 MMORPG(Massively Multiplayer Online Role-Playing Game : 대규모 다중 사용자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 게임을 처음 접했다. 물론 그 이전에도 흔히 불리는 RPG(Role-Playing Game : 각자 맡은 역할을 플레이하는 게임)를 접한 적은 있지만 온라인을 이용한 RPG는 처음이었다.
운이 좋게도 정식 서비스를 하기 전 테스터 형식으로 접하게 되면서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빨리 체험하게 되었고 그 당시 “반지의 제왕”에 빠져 있던 터라 “나이트엘프”를 선택하고 '드루이드드라는 직업을 선택하여 게임을 시작하게 되었다.(내 첫 시작은 ‘얼라’였었구나...) 선택하는 종족마다 다르지만 나이트엘프는 “다르나서스(wow에 존재하는 칼림도어 대륙 북서쪽에 위치하는 지명)”라는 곳에서 시작하게 된다.
어찌 되었건 그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커뮤니티 사이트라는 것들이 많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어디를 어떻게 가는지, 이쪽으로 가면 어디가 나오는지도 몰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원시적인 일이지만, 일단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야 했다. 지나가는 캐릭터가 보이면 채팅창을 통해 물어봐야 했었고, 신기하게도 다들 친절하게 받아주었다. 게다가 하필 내가 처음 시작한 저 “다르나서스”라는 곳은 일종의 제주도 같은 섬(사실 땅은 아니지만)인지라 어느 정도 퀘스트를 진행하면 그곳을 벗어나 육지로 나가야 했다. 초반 퀘스트를 하며 뛰놀던 놀이터 같은 곳에서 통근버스 같은 탈것(히포그리프. 당시에는 개인 탈것은 존재하지 않았다!)을 타고 날을 때의 그 기분은 지금의 그 어떤 게임에서도 느낄 수 없는 그것(!)이었다.
그러다가 캐릭터의 레벨이 올라갈수록 지루함이 느껴졌다. 복합기 같은 전자제품을 싫어하던 내가 왜 드루이드를 골랐던 걸까... 드루이드라는 클래스는 평상시에는 엘프의 모습이지만 필요에 따라 변신을 하는 형태였는데, 육중한 전투 스타일이 필요할 때는 곰으로, 민첩하고 치명적인 공격이 필요할 때는 표범으로 변신을 한다. 이런 특징이 멋스러워 보이기도 했었고 당시(오리지널) 오프닝 영상이 드루이드를 선택하는데 한 몫하긴 했다. 아무튼, 이런 매력적인 클래스이지만 그 당시 기준에선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런 것이었다. 치유의 기능도 있어서 힐러의 역할도 담당할 수 있었지만 RPG의 특성상 전문 직업의 그것만큼을 따라가긴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드에서는 꽤 인기가 좋았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말을 걸어 줬으니까. 사실 말을 걸었다기보다는 부탁이었는데, 열명 중 여덟 명은 이 말이었다. “발바닥 좀 찍어 주세요”
발바닥이 뭐냐 하면, 곰발바닥 모양의 아이콘이 캐릭터 머리 위에 뜨는 “야생의 징표”라는 것. 그래서 나온 드루이드의 별명이 “드닥발(드루이드는 닥치고 발바닥)”이다. 아무튼 이 “야생의 징표”라는 주문은 나에게도 걸 수 있고 다른 사람에도 걸어 줄 수 있는데 이 주문을 걸어주면 일정 시간 동안 모든 공격에 대한 저항이 생긴다. 쉽게 말하자면 게임 캐릭터가 불 공격을 받으면 덜 뜨겁고, 얼음 공격을 받으면 덜 차갑다는 것이다. 물론 물리적인 방어력도 높아진다. 쉽게 말해 늦게 죽는다.
RPG는 주로 캐릭터나 몬스터가 각각을 상대로 공격을 하고 공격받는 만큼의 대미지를 입는데, 지속적으로 쌓인 대미지의 값이 캐릭터나 몬스터 고유의 체력(보통 HP라고 쓰고 ‘피’라고 읽는다)을 모두 소진시키면 소진당한 쪽이 죽게 된다. 그래서 게임에서는 캐릭터가 성장(보통 레벨업이라고 하지만 레벨은 정해져 있고 무기와 무장이 성장하는 경우도 있다.)하게 되면 체력과 방어력, 공격력이 모두 올라가고 이 성장된 성장치에 무기마다 고유의 공격력이나 방어력을 합산하여 공격하게 된다. 그러려면 “내가 때릴 때는 더 아프게, 내가 맞을 때는 덜 아프게”가 최상의 솔루션이 된다. 그래서 더 좋은 무기와 방어구를 구매하거나, 퀘스트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무기나 방어구를 받으려고 노력하게 된다.
이렇게 마법이나 아이템을 통해 능력을 올려주는 것을 게이머들 사이에서 어느 순간부터 “버프(buff)”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 개념을 "버프"를 라고 부르는 것이 그 당시 국내에선 드물었지만 외국의 커뮤니티에선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단어였기 때문에 외국 커뮤니티의 정보도 함께 찾아보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쓰이게 되었고 요즘 게임 커뮤니티나 정보 사이트에서는 흔하게 사용되는 말이 되어 버렸다. 몇 번 들으면 금방 적응은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사실 처음엔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엔 너무 흔해 그 사용 방법이 너무 자연스럽지만..
저 ‘발바닥”의 경우는 마법에 속하는 버프이지만 마법뿐 아니라 아이템으로도 가능한데 흔히 말하는 마법 약(potion)으로도 가능하고, 재미있게도 일정 시간 앉아서(식사 계열의 아이템을 소비하면 일정 시간 동안 앉아서 행동을 취하게 되는데 일정 시간 동안 앉아 있지 않고 일어서거나 하면 효력이 발생되지 않는다.) 식사를 할 때도 가능하다. "밥심("힘"이라고 쓰고 "심"이라고 읽는다)"으로 버틴다는 말이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아무튼 이렇게 능력이나 성능을 향상시켜주는 것이나 효과를 최근엔 주로 “버프 받았다”라고 표현하는데 이 버프라는 단어는 처음부터 이런 느낌의 단어는 아니었다.
이 버프(Buff)라는 말은 그당시 우리나라 게이머들에겐 익숙한 단어가 아니어서 신조어 정도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사용된 근거를 찾아 올라가면 꽤 오래전부터 사용된 단어이다. 원래 사전적인 의미는, 강하거나 근육이 발달한 건강한 몸을 뜻 하는 영국 속어라고 한다.
buff
-adjective
having a strong, health body with well-devel oped muscles.
속어로 많이 쓰인다고들 하는데 대충 쉽게 읽어 봐도 근육질 몸매의 강하고 건강한 모습이 생각난다. 앞에서 이야기했지만 상대적으로 강해지기 위한 마법이나 효과의 이름으로 아주 적절하다.
그런데 사실 처음에 이 단어가 이런 뜻을 지니고 있기 전에는 어떤 물건을 가리키는 명사에서 시작되어 이러한 뜻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