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실험과 본능의 경계에서
셀 수도 없이 많아진 이미지 생성 도구들의 시대다.
이젠 자고 일어나면 하나쯤은 새로 생겨 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새로운 AI 이미지 생성 도구의 등장은 눈에 띄게 늘어났고, 생성해내는 이미지의 퀄리티도 하루가 다르게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다. 그야말로 AI 이미지 생성의 춘추전국 시대이다. 누구나 몇 줄의 문장만으로 시각적 결과물을 뽑아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누군가는 상상도 못할 기회가 열렸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곧 일자리를 모두 빼앗기게 될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도구들을 빠르게 습득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했고, 그만큼 사용 빈도도 높아지면서 생산이 과잉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이런 과잉된 생산물이 생기는 시점이 되면 사람들은 그것들을 유희의 수단으로 삼고 가지고 놀기 시작한다. 잉여는 단순히 버려지지 않는다.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고대 사회에서는 남는 곡물이나 자원을 제의나 축제로 소비했고, 산업화 이후에는 과잉 생산된 물건들이 예술의 재료가 되곤 했다. 디지털 시대의 잉여 이미지 역시 비슷한 경로를 따라간다. 과잉된 생성물은 밈이 되고, 패러디가 되고, 놀이가 되며, 때로는 아주 진지한 예술로 전환되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예상치 못한 결과들이 따라오게 마련이다.
요즘 AI 이미지 생성 도구들을 보다 보면, 종종 기묘하게 느껴지는 구도나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솔직하게 말하면 사실 기묘하진 않다. 이미지가 보여주는 의도가 확실하게 보이지 않나. 누가 요청한 것도 아닌데, 캐릭터의 발바닥이 유독 강조되거나, 맥락 없이 등장한 겨드랑이의 클로즈업이 프레임을 차지하고 있는 식이다.
이미지만 놓고 본다면 크게 문제될 부분은 없지만, 이런 이미지들의 구도나 인물의 자세에서 파생되는 형태나 모습은 누가 봐도 자칫 검열의 잣대 위에 놓일 만한 위험한 언저리에 닿아 있다. 아슬아슬한 지점. 의도하지 않았지만, 반복되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 분명해진다. 분명 '의도하지 않음'을 가장한 패티시 이미지의 구현이다.
이미지 생성 AI들은 대부분 검열 과정을 거친다. 프롬프트를 입력할 때 1차적인 필터링이 이루어지고, 생성된 이미지를 최종 출력하기 전에 다시 한 번 검열이 진행된다.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된 결과물은 출력되지 않거나 흐림 처리되며, 때로는 생성 자체가 거부된다. 이러한 다단계의 검열 구조는 단순히 기술적인 장치라기보다, 우리가 던지는 프롬프트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시스템 사이에는 일종의 문화적 필터가 작동한다. 맥락 없이 등장한 발바닥과 겨드랑이 클로즈업 이미지들은 이러한 검열을 교묘하게 피해가면서, 동시에 그 경계에 최대한 밀착한 형태로 재생산되고 있는 셈이다.
누군가 한 번 만들고 나면, 다른 누군가가 그걸 따라 하고, 그게 다시 알고리즘을 타고 순환하면서 ‘기호’가 되어버린다. OpenAI의 샘 알트만(Sam Altman)이 지브리 스타일의 이미지를 언급한 이후,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의 SNS 프로필 이미지는 지브리 스타일로 바뀌었고, 심지어 당근마켓을 통해 장당 1,000원씩 생성해 주는 용역상품도 등장하며 비슷한 장면과 구도의 '지브리풍 이미지'들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누군가의 취향이 발화되면, 곧 그것은 반복되고 전파되며, 알고리즘은 그 기호를 더욱 강화하기 마련이다.
이렇게 반복되어 생산되다 보면 검열의 강도는 더 심해질까? 아니면 오히려 순화될까?
예술은 언제나 이러한 검열과 통제의 흐름에 맞서 왔다. 1863년,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는 살롱 심사에서 탈락한 작품 <풀밭 위의 점심 (Le Déjeuner sur l’herbe)>을 낙선전에 걸었다. 고전 신화나 역사화가 아닌, 현대적 복장의 남성과 나체 여성을 함께 그린 이 작품은 당시로선 충격이었다.
당시 누드는 신이나 신화 속 인물에게만 허용되는 일종의 특례였고, 현실 속 인물에게 적용되는 것은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았다. 누드 그 자체보다, 누드가 '아무 맥락 없이 일상에 섞여 있는 장면'이 문제였던 것이다. 검열은 이 작품을 배제했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새로운 예술 운동의 전환점이 되었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은 그런 검열에 대한 초기의 대답 중 하나였다. 당시 살롱(공식 전시회)에서 탈락한 작가들이 따로 모여 열었던 이른바 ‘낙선전’은, 기존 권위와 기준에 맞서기 위한 새로운 전시 공간이었다. (이 사례는 이후 "검열과 우회" 편에서 더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은 아카데믹한 검열에 맞서 낙선전을 열었고, 전체주의 체제 속의 작가들은 상징과 은유로 말하기 시작했다. 디지털 시대의 작가들 역시, 알고리즘의 필터를 피해 슬쩍 비켜서거나, 오히려 그 필터 자체를 작품으로 전환하기도 한다. 검열이 강화될수록 표현은 교묘해지고, 우회는 더 창의적이 된다. 결과적으로 검열은 표현을 막기보다는,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든 새어 나오게 만드는 또 하나의 무대가 되곤 한다.
익숙함은 때때로 경계심을 무디게 하지만, 동시에 그 익숙함이 ‘의도된 패턴’처럼 보일 때는 오히려 더 민감한 기준에 부딪히기도 한다. 결국 문제는 이미지 자체가 아니라, 그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습관’의 구조에 있는지도 모른다.
이때 말하는 ‘습관’은 단순한 반복이나 익숙함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처음엔 실험이었던 방식이 반복되면서 본능처럼 굳어지고,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프롬프트와 구성이 일종의 모범답안처럼 자리 잡게 된다.
특히 이미지 생성에 익숙하지 않거나, 언어적으로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사용자에게는 프롬프트 자체가 진입 장벽으로 다가올 수 있다. 이럴 때 잘 짜인 프롬프트를 그대로 복사해 사용하는 방식은 반복을 더 가속시키고, 그 결과는 더 빠르게 구조화된 틀 안으로 수렴되곤 한다.
그 구조 안에서 생성된 이미지들은 개인의 표현이라기보다, 플랫폼과 알고리즘, 사용자의 습관이 뒤섞인 집단적 무의식의 결과에 가깝다. 결국 창작의 문제는 이미지 그 자체보다, 그것이 어떤 경로를 따라 생산되고 반복되고 확산되는지, 그 메커니즘에 있다는 말이다.
창작은 실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본능의 발현이기도 하다. 실험은 낯섦을 시도하고, 본능은 익숙함에 머문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를 닮아가며, 결국 같은 경계선 위를 걷게 된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는 의지와, 익숙한 쾌감을 향해 되돌아가려는 습관. 어쩌면 이 둘 사이의 흐릿한 경계를 탐색하고 있는 건, 인간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창작실험과 본능의 경계'-이제는 인간뿐 아니라, 도구조차 이 경계 위에 서 있는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