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7년, 근대의 탄생 (스티븐 그린블랫, 까치)

by 리디언스

1417년, 근대의 탄생(스티븐 그린블랫, 까치)


한동안 잊고 지냈던 이름을 신간 소식에서 마주했습니다. 스티븐 그린블랫(Stephen Greenblatt)입니다. 한때 푹 빠져 읽었던 그의 책을 다시 꺼내 들었습니다.


<1417년, 근대의 탄생>(까치)은 주인공 포조 브라촐리니가 독일의 한 수도원 서고에서 루크레티우스의 책 한 권을 발견하며 잃어버린 사상이 되살아나는 순간을 그린 작품입니다. 루크레티우스는 제가 오래전부터 관심 갖던 고대의 철학자입니다. 그의 사유는 젊은 시절보다 나이가 들수록 세밀한 울림으로 스며듭니다. 인간의 유한함을 받아들이는 담담한 통찰이 요즘의 저의 마음과 닿아 더욱 흥미롭습니다.


르네상스와 인문주의는 궁정의 화려함이나 성당의 첨탑에서 시작된 게 아닙니다. 먼지 쌓인 수도원 서가에서 책을 보존하고 읽으려는 손길에서 피어났습니다. 수도사들은 성서뿐 아니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위대한 저자들이 쓴 고전을 필사하며 지켜냈습니다. 이교도의 금지된 사상조차 학문의 전통 아래 복제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르네상스와 인문주의는 책 읽기와 보존의 행위에서 출발한 역사이자 사유의 흐름입니다.


1417년 겨울, 교황청 비서이자 인문주의자였던 포조 브라촐리니가 남부 독일 수도원 서고에서 오래된 라틴어 필사본 한 권을 발견합니다. 고대 로마 철학자 루크레티우스의 철학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였습니다. 그린블랫은 이 장면을 군대도 혁명도 없이 세계의 궤도를 미세하게 비트는 순간으로 그려냅니다. 루크레티우스의 시 속에서 우주는 신의 섭리가 아니라 무수한 원자들이 충돌하다 미세하게 ‘일탈(클리나멘)’할 때 움직이고, 그 클리나멘이 인간의 자유의지 가능성을 준다고 했습니다. 또한 쾌락과 미덕은 대립하지 않고 서로 얽혀 있다고 했습니다. 그린블랫은 근대의 탄생이 바로 이 ‘일탈’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루크레티우스의 시는 그렇게 세상에 풀려 예술과 철학, 정치와 과학으로 스며듭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 권의 책이 세계사를 바꿨다는 단순 도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문명에 억눌려 온 사상과 사유가 비로소 세상에 부유하는 서사라 할 수 있습니다. 포조 브라촐리니와 동료 필사가들은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작업으로 필사했습니다. 이 노동은 인문주의와 르네상스라는 거창한 이름 이전에 읽고 옮기고 토론하는 구체적 독서 행위와 동반하여 이루어졌습니다.


결국 르네상스와 인문주의는 오랜 시간동간 잊혀 바스러지던 책을 다시 읽고 보존하는 행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정보를 모아 유지하고 전달하는 단순한 작업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고전을 펼치는 건 인간의 역사를 발굴하고 인간의 존재를 다시 정의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AI에게 질문을 던지면 즉각 요약과 해석이 제공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같은 정보와 지식을 읽고 이해하는 작업이라 할지라도 포조 브라촐리니가 먼지 쌓인 서가에서 책을 꺼내 들던 그 경이에 찬 동작과, 우리가 화면을 스크롤하는 가벼운 손길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AI는 너무나도 뛰어나게 텍스트를 계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해되지 않는 문장과 구절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다시 묻는 그 느린 과정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자 영역입니다. 아무리 월등한 능력의 AI라 하더라도 독서가 일으키는 내면의 변형까지 대신해주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자동화된 요약이 범람하는 세계에서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호흡으로 읽는 일은 일종의 시대적인 저항입니다. 또한 스스로를 지키는 작은 은신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쩌면 AI가 활성화될수록 책과 독서는 더 중요해질지도 모릅니다.


저는 인문학자도 아니고, 철학과 역사를 체계적으로 공부한 사람도 아니다. 다만 한 사람의 독자로서 이 이야기를 읽습니다. 인문주의가 거대한 역사의 흐름과 이념이 아니라 한 권의 책을 읽고 보존하려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위로가 됩니다.


저는 여전히 신을 믿습니다. 그러나 정작 저를 매료시키는 건 유물론자 루크레티우스가 쓴, 세계를 신의 섭리가 아닌 원자 운동으로 설명하는 그 문장들을 모은 책입니다. 그러나 이 모순이 불편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세계관이 내 안에서 마주한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다른 각도로 나를 성찰하게 해 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불완전하게 보이는 믿음이야말로 세계를 한 설명으로 봉합하지 않으려는 작은 ‘일탈’ 즉 클리나멘일지도 모릅니다. 그 미세한 빗겨남 속에서 저는 다시 읽고, 생각하고,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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