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관리의 죽음 (안톤 체호프)

by 리디언스

<어느 관리의 죽음> (안톤 체호프)


서열이 현실에서 만들어지는 현상은 지극히 당연하게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세계, 이를테면 정신에도 서열 같은 것이 있을까요. 살아보니 때로는 그런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는 늘 어깨를 펴고 다니고 누군가는 발끝으로 바닥을 더듬듯 웅크리며 걷습니다. 같은 길을 걷고 있지만 걷는 방식이 전혀 다른 것입니다.


문학 속에도 그런 인물들이 있습니다. 니콜라이 고골의 작품 속 인물인 아카키와 포프리시친, 로베르트 발저의 헬블링, 그리고 안톤 체호프의 체르뱌코프등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들의 존재 밑바닥에는 어딘가 위축되어 세상을 향해 몸을 충분히 펼치지 못하는 인간의 그림자가 깔려 있습니다. 조금 거칠게 말하자면 찌질함이 깔려있는 인물들입니다.


고골의 <외투>에서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낡은 외투만큼이나 얇은 자존을 지닌 채 늘 옷깃을 여미며 세상 가장자리에서 살아갑니다. 그의 삶은 거창한 사건과는 거리가 멉니다. 다만 종이 위에 글자를 옮겨 적으며 겨우 존재의 흔적을 남길 뿐입니다. <광인일기>의 포프리시친은 더 기묘합니다. 현실의 문턱에서 밀려난 그는 점점 세계와 어긋나고 마침내 미쳐버리고 맙니다. 발저의 <헬블링 이야기>에서 주인공 헬블링 역시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변두리에서 서성이는 인물입니다. 그의 삶은 스스로 길을 내는 사람의 태도와는 거리가 멉니다. 언제나 누군가의 발걸음을 뒤따르며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조차 분명히 알지 못한 채 움직입니다.


하지만 이들보다 더 처연한 인물이 있습니다. 체호프의 단편 <어느 관리의 죽음>에 등장하는 회계 관리 체르뱌코프입니다. 그는 아주 사소한 사건 하나에 붙들립니다. 극장에서 우연히 재채기를 했고 그 침방울이 장관의 목덜미에 튀었습니다. 사실 그것이 전부입니다. 세상이 뒤집힐 만큼의 사건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체르뱌코프의 마음속에서는 그 순간 작은 균열이 생깁니다. 그는 장관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그는 장관에게 사과하고, 또 사과하고, 또 사과합니다. 그리고 그 불안과 중압감 속에서 끝내 제풀에 죽어버립니다. 정작 장관은 그 일에 거의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체르뱌코프에게는 타인(장관)의 시선이 이미 거대한 심판처럼 느껴졌던 것입니다. 타인의 눈치를 보며 살아온 마음이 결국 자기 자신을 집어삼켜 버린 셈입니다.


사실 그가 진짜로 두려워한 것은 장관의 분노가 아니라 타인의 시선 속에서 이미 초라해져 버린 자기 자신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설사 장관에게 침이 튀었다 한들 그저 웃으며 손수건을 꺼내 들고 사과하면 되는 작은 용기, 그 정도면 충분한 일이었습니다. 아무에게도 밀려나지 않았지만 스스로 뒤로 물러나다가 삶의 끝으로 툭 떨어져 버린 것입니다.


이 장면은 어쩌면 하나의 조용한 철학적 장면이기도 합니다. 장폴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단순히 타인을 비난하는 문장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기 존재의 기준을 타인의 시선에 맡겨버리는 순간, 스스로의 삶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경고에 가깝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가는 존재입니다. 결국 자신을 끌고 가는 힘은 자기 안에서 나와야 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면 우리는 쉽게 타인의 보폭에 발을 맞추게 됩니다. 그 길이 편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남는 것은 남의 발자국뿐이고 정작 자신의 길은 사라지고 맙니다. 대체할 수 없는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순간순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는 걸 다시 한번 느낍니다.


이번 주에 있을 독서모임은 체호프의 단편집에서 두 편을 골라 진행할 예정입니다. 오랜만에 제가 발제를 맡기로 해서 단편집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열린책들)앞 부분에 있는 두 작품, <어느 관리의 죽음>과 <애수>로 정하는 꼼수를 부렸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목마른 여자들 (베르나르 키리니,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