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민음사)
보르헤스의 단편집 <픽션들>을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아르헨티나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현대 문학에서 가장 독특한 세계를 이룬 인물로 꼽힌다. 도서관과 백과사전, 가상의 문헌과 실제 역사를 뒤섞으며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흐렸고, 그렇게 만들어낸 지적인 미로로 20세기 문학과 사유의 방향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보르헤스의 작품들은 그가 <픽션들>의 서문에서 ‘방대한 책을 쓴다는 것은 쓸데없이 힘만 낭비하는 짓이다’라고 말했듯이 주로 단편이다. 그러나 그 짧은 이야기들 속에는 철학과 신학, 역사와 문헌학이 끝없이 반사되며 서로를 비추는, 말하자면 거울 같은 구조가 숨어 있다. 특히 그는 이야기를 단순한 창작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텍스트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으로 보았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저는 그의 문장 속에서 종종 길을 잃는다.
오늘 다시 읽은 <픽션들> 속 작품 가운데에서도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는 보르헤스가 말하고자 했던 그 개념이 가장 또렷하게 드러난 작품이 아닐까 싶다.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에서 화자는 지적인 문학인으로 보인다. 그는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삐에르 메나르’라는 작가의 저작 목록을 정리하다가 어떤 놀라운 책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그 책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1부 9장과 38장, 그리고 22장의 일부로 구성된 책이다. 그럼에도 화자는 세르반테스를 ‘평범한 천재’라고 깎아내리는 반면, 삐에르 메나르에 대해서는 거의 경탄에 가까운 찬사를 보낸다.
화자는 분명 삐에르 메나르가 <돈키호테>를 다시 썼다고 말한다. 그러나 ‘다시 썼다’는 표현은 어딘가 이상하다. 세르반테스의 소설을 현대어로 번역한 것도 아니고 새롭게 각색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는 세르반테스의 문장을 단어 하나까지 완벽하게 동일하게 썼다.
“진리, 진리의 어머니는 시간의 적이고, 사건들의 저장고이고, 과거의 목격자이고, 현재에 대한 표본이며 충고자이고, 그리고 미래에 대한 상담관인 역사이다.”
이 문장은 우리가 아는 17세기의 작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1부 9장에 등장한다. 그런데 화자는 이 문장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17세기의 ‘평범한 천재’인 세르반테스에 의해 편집된 이러한 열거형 문장은 역사에 대한 단순한 수사적 찬양에 불과하다. 반면 메나르는 이렇게 적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메나르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
“진리, 진리의 어머니는 시간의 적이고, 사건들의 저장고이고, 과거의 목격자이고, 현재에 대한 표본이며 충고자이고, 그리고 미래에 대한 상담관인 역사이다.”
보다시피 세르반테스의 텍스트와 삐에르 메나르의 텍스트는 완벽하게 동일하다. 그럼에도 화자는 왜 메나르가 <돈키호테>를 ‘다시 썼다’고 말했을까.
그건 아마도 동일한 텍스트라 하더라도 그것이 읽히는 시대와 역사적 배경, 그리고 그 시대를 지배하는 정신과 사상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삐에르 메나르의 <돈키호테>가 세르반테스의 그것보다 더 깊고 더 놀랍다고 찬미한다. 이 기묘한 찬사는 처음 읽을 때는 하나의 농담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이 이야기는 기존의 문학 개념 자체를 흔드는 급진적인 질문을 던진다.
텍스트의 의미는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만약 같은 문장이 다른 시대에 다시 쓰일 때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면 텍스트의 의미는 더 이상 저자에게만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대와 역사, 그리고 무엇보다 독자의 해석 속에서 끊임없이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 된다. 즉, 텍스트의 의미는 그 자체로 고정된 진리가 아니라 시간을 포함한 독서의 과정 속에서 새로이 재구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문학의 중심이 ‘저자’에서 ‘독자’로 이동해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다. 보르헤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롤랑 바르트의 <텍스트의 즐거움>을 떠 올린다 바르트 역시 텍스트의 의미는 저자의 의도가 아니라 독자의 읽기 행위 속에서 탄생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같은 문장이라도 내가 어느 나이에, 어떤 기억을 지닌 채, 어떤 장소에서 읽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작품을 덮고 나면 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내가 읽어온 모든 책은 사실 한 번도 같은 책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아마 그래서 이미 읽었던 책을 다시 펼칠 때마다 늘 새롭게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그것이 내 아둔한 기억력 탓만은 아니라는 사실에 은근히 안도하게 된다.
아무튼 올해는 예전에 읽었던 책들을 다시 꺼내 읽어보려고 마음먹었다. 지금까지는 그 기조가 꽤 잘 유지되고 있다. 보르헤스의 말대로라면 어쩌면 그것은 예전의 책을 다시 읽는 일이 아니라 이제 막 새로 쓰이기 시작한 책을 읽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가지고 있는 저 책 <픽션들>은 2004년에 구입한 ‘고 황병하 교수’의 번역본이다. 현재는 다른 분의 번역으로 출간된 것으로 알고 있다. 내친김에 새로운 번역으로 다시 읽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또 다른 텍스트로 읽힐 게 뻔하다는 것을 알기에 벌써부터 조바심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