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문학동네)

by 리디언스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문학동네)


우리 가요 중에 <모모>라는 노래가 있다. 어린 시절 그 노래를 들을 때 나는 당연히 그 모모가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에 등장하는 ‘시간의 소녀’라고 생각했다. 노래가 유행하던 시기와 그 소설이 널리 읽히던 시기가 겹쳤고, 특히 ‘생을 쫓아가는 시곗바늘이다’라는 가사 속의 ‘시간’이라는 단어가 그런 확신을 더욱 굳혀 주었다.


그러나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에밀 아자르의 소설 <자기 앞의 생>을 읽고 나서야 그 노래 속 ‘모모’가 다른 곳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이름은 시간을 되찾는 동화 속 소녀가 아니라 파리 벨빌의 허름한 골목을 떠돌던 한 아이, 모모에게서 차용된 것이다.


<자기 앞의 생>은 사실 아주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헤아려 보면 20년도 더 지난 듯하다. 이상하게도 그동안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책이다. 아마도 그 이야기 속에 스며 있는 어떤 슬픔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소설이다. 버려진 한 아이가 같은 처지의 어른 곁에서 자라며 사랑과 생의 무게를 알아가는 이야기다. 파리 벨빌의 낡은 건물에서 매춘부들의 아이들을 돌보며 살아가는 유대인 노파 로자 아줌마, 그리고 그녀 곁에서 자라는 열네 살 소년 모모. 세상으로부터 밀려난 사람들은 서로를 붙잡으며 겨우 살아간다.


모모의 세상에는 화려한 것이 거의 없다. 창녀들, 이민자들, 늙은 유대인, 이름 모를 가난한 사람들. 그러나 그 남루한 세계 속에서 아이는 사람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조금씩 깨닫는다.


이 소설을 관통하는 질문은 아주 단순하다.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는가.


작품 초반 모모는 하밀 할아버지에게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나요?”라고 묻는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무심하게 “그렇단다.”라고 대답한다.


아마도 그것은 오래 살아본 사람의 말일 것이다. 세상에는 사랑 없이도 이어지는 날들이 있다는 것을 건조하게 하는 말이다.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끈질기게 살아남는지를 아는 사람의 대답이다. 그러나 이야기가 더 깊어질 때 할아버지는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말을 바꾼다.


사람은 어쩌면 사랑 없이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할 사람이 없다면 그 삶은 끝내 공허한 그것밖에는 되지 않을까. 그래서 모모는 결국 ‘사랑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모모에게 로자 아줌마는 그런 존재다. 피로 맺어진 가족은 아니지만 세상에서 유일하게 서로를 지켜주는 사이다. 로자가 병들어 점점 무너져 갈 때 아이였던 모모는 어느 순간 그 역할을 뒤집어 그녀를 돌보는 사람이 된다. 그는 로자를 세상의 눈에서 숨기기 위해 지하실 방으로 모셔 내려가고 그곳에서 한 인간이 ‘생’이라는 거대한 힘에 의해 서서히 사라져 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때 모모는 생이라는 것은 누군가를 태어나게 하면서 동시에 데려가는 힘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이 소설은 슬프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완전히 절망적이지만은 않다. 로자 아줌마가 떠난 뒤에도 모모 곁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밀 할아버지, 그 낡은 건물에 살던 이웃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로자를 향해 여전히 남아 있는 사랑 때문이다.


아무튼 책을 처음 읽었던 그때 마음이 많이 아팠던 기억이 있다. 지금도 역시 그 감정은 숨길 수가 없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른 느낌이다. 사랑했던 사람이 사라졌더라도 그 사랑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그걸 알기 때문이다.


생은 잔인하다. 그러나 또한 이상하리만치 따뜻하다. 그래서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을까?’ 라고 다시 묻는다면 이제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어쩌면 사랑 없이도 살아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 앞에 있든 없든, 이 세상에 사랑할 사람이 어딘가에라도 존재한다면 내 앞에 놓인 삶은 그런대로 살만한 생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사람은 사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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