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조선과 소설 모비 딕, 그 절묘한 연결

by 리디언스


근대 조선과 소설 모비 딕, 그 절묘한 연결


어제부터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을 펼쳤다. 연초에 묵직한 고전을 다시 읽기로 하면서 추린 책으로는 돈키호테 다음으로 두 번째다..


17세기부터 시작된 미국의 연안 포경업은 18세기말, 대서양을 건너 태평양까지 나아가는 원양 포경으로 확장되었다. 1820년대에는 일본 근해로, 그리고 1840년대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조선의 동해까지 진출했다. 당시의 포경산업은 오늘날의 석유산업에 비견될 만한 막대한 상업적 가치를 가진 산업이었다. 그러한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 그리 놀라운 사실도 아니다.


허먼 멜빌의 위대한 작품 <모비 딕>은 바로 이 시대의 포경선을 배경으로 한다. 작품 초반, 화자 이슈메일이 항구 도시 뉴베드퍼드에 도착하는 장면이 나온다. 뉴베드퍼드는 이미 고래의 도시로 명성을 얻은 곳이었다.


‘나는 셔츠 한두 장을 쑤셔 넣은 낡은 여행가방을 겨드랑이에 끼고 혼 곶과 태평양을 향해 출발했다. 정든 맨해튼을 떠나 제시간에 뉴베드퍼드에 도착했다. 12월의 어느 토요일 밤이었다. 나는 낸터컷으로 가는 소형 정기선이 벌써 떠나버렸고 다음 월요일까지는 그 섬에 갈 방도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알고는 적잖이 낙심했다. 고래잡이의 고난과 형극의 길을 지망하는 젊은이들은 대개 이 뉴베드퍼드에 머물다가 항해를 떠나기 때문에,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말해 두는 편이 나을 듯싶다. (중략) 게다가 최근에는 뉴베드퍼드가 서서히 포경업을 독점하기 시작했고 이 점에서 낸터컷은 가엾게도 뉴베드퍼드보다 훨씬 뒤떨어져 있지만, 오랜 역사를 지닌 낸터컷은 포경업의 발상지이고 미국에서 최초로 고래의 시체가 떠밀려 온 곳이다’ (모비 딕, 허먼 멜빌, 작가정신 p 37~38)

이슈메일은 뉴베드퍼드에서 이틀밤을 묵기로 하고 허름한 여관을 찾는다. 뉴베드퍼드는 포경업의 발상지이자 전통적 중심지 낸터컷이 쇠락하는 대신 새로운 포경업의 요지로 떠오르던 곳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이 ‘뉴베드퍼드’라는 도시 이름이다.


멜빌이 <모비 딕>을 세상에 내놓은 때가 1851년이다. 그 무렵 뉴베드퍼드는 낸터컷을 제치고 포경산업의 중심지로 굳건히 자리 잡는다. 고래 기름의 향기가 항구 골목을 메우고 도시는 팽창하며 바다로 향한 인간의 욕망으로 들끓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소설이 발표된 바로 그 시기, 조선의 근대사 초입에서도 ‘뉴베드퍼드’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물론 조선의 배가 태평양을 건너 그 항구에 정박했다거나 하는 류의 거창한 이야기는 아니다.


‘1855년 강원도 통천(현재 북한 고성군 남애리)에 외국인 선원 4명이 표류해 왔습니다. 이들은 선장의 학대에 못 이겨 작은 보트를 타고 탈출했다가 악천후 끝에 통천 앞바다에 도착한 포경선의 선원들입니다. 조선 정부는 그들을 서울로 옮겨 정체를 파악하는 한편 신체 모습과 함께 알파벳 26자, 단어 9개를 한자와 한글로 적어 양화첩(洋畫帖)에 기록했습니다.’ (한국 근대의 바다, 한철호, 경인문화사 p 32~34)


낯선 문명이 조선의 서책 속으로 처음 흘러든 순간이었다. 사실 한반도 해역에는 1876년 개항 이전에 이미 이양선(異樣船)이라 불렀던 서구 열강의 함선들이 자주 출몰하곤 했다.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이 함대를 동원한 무력시위를 하기 전에 이미 침탈 전조 현상이 있었던 것이다.


뒤에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그들이 승선했던 배는 바로 미국 뉴베드퍼드항에서 출항한 포경선 투 브라더스(Two Brothers) 호였다. 1854년 6월, 멜빌의 고향이기도 한 뉴잉글랜드 북동부의 그 항구에서 출발해 동해 인근까지 건너왔던 배다. <모비 딕>의 이슈메일이 출항하던 바로 그 뉴베드퍼드에서 같은 시기 실제 선원들도 고래를 좇아 세계의 바다를 떠돌기 위해 출항했던 것이다. 이들은 동해 인근에서 고래를 잡다가 선장의 학대에 반발하여 탈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서 문득 엉뚱하면서도 흥미진진한 상상이 생긴다. 혹시 그 투 브라더스 호는 허먼 멜빌이 항구에서 마주쳤던 수많은 포경선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혹은 그 배의 선원 중 누군가는 뉴베드퍼드의 선술집 골목을 거닐던 멜빌과 스쳤던 인연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통천 앞바다에 표류한 그들의 이야기가 언젠가 멜빌의 귀에 전해졌을 수도 있다. 포경의 세계를 거의 학문적으로 탐구했던 멜빌의 성향을 생각하면 그리 터무니없는 상상만은 아닐 것이다.


아무튼 1850년대 중반 스펙터클한 한국 근대사의 서막이 열릴 즈음, 폭풍전야와 같은 시기에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조선의 강원도 통천과 허먼 멜빌, 모비 딕 그리고 미국 뉴잉글랜드의 뉴베드퍼드가 이렇게 연결되어 있다.


역사와 문학은 간혹 예기치 않게 서로 교차하기도 하고 포개지기도 하며 흥미로운 서사를 만들어낸다. 그 겹침과 혼돈 속에서 인간의 세계는 새롭게 읽힌다.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모비 딕>과는 별개로 ‘고 한철호’ 교수님의 책 <한국 근대의 바다> (경인문화사)도 읽기를 권한다. 바다를 중심으로 한 한국 근대사를 아주 흥미롭게 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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