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장 그르니에, 민음사)
얼마 전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다시 읽고 나서는 습관처럼 장 그르니에를 떠올렸다. 언제부터인가 카뮈의 책을 읽고 나면 도돌이표처럼 장 그르니에를 찾게 되고 어느새 그의 <섬>을 손에 들게 된다. 그렇지만 이 습관을 단지 장 그르니에가 카뮈의 스승이기 때문이라는 상투적인 이유로만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의 사유가 다른 사유를 불러오는 일이다. 한 권의 책이 또 한 권의 책을 부르고 생각이 생각을 불러오는 일이라고 치면 오히려 자연스럽다.
<섬>은 그간 몇 번을 읽었음에도 개정판까지 합해 모두 세 권을 가지고 있다. 그만큼 좋아한다는 뜻이다. 이미 가지고 있는 책을 다시 사는 일은 어쩌면 비합리적인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책을 좋아하는 마음은 조금 비합리적인 데서 시작되는 것 같다. 같은 문장을 이미 읽었는데도, 다른 종이와 다른 표지와 다른 시간 속에서 그 문장을 다시 만나고 싶어진다.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한 구매라기보다, 어떤 사유를 오래 곁에 두고 싶다는 애정에 가깝다. 그래서 세 권의 <섬>은 단순한 중복이 아니라 내가 그 책을 얼마나 오래 붙들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작은 연대기처럼 느껴진다.
<섬>은 거대한 체계나 어떤 완결된 이론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단상과 기억, 풍경과 명상, 짧은 사유의 파편들이 느슨하게 이어지며 흘러가는 책이다. 제목처럼 섬은 고립의 상징이지만 그 고립은 단절이라기보다 고요를 위해 떨어진 거리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바깥세상의 소음이 조금은 멀어지고 대신 내면의 숨소리가 또렷해진다. 그르니에의 문장은 무엇인가를 결론 내리기보다 내 안에 놓인 침묵을 듣게 만든다. 그래서 이 책은 철학적이면서도 문학적이고 사유적이면서도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책이다. 분명 지적인데도 결코 차갑지 않다.
‘파리에서는 아파트 경비원이나 호텔의 수부 계원 이외에는 그 어느 누구와도 접촉하는 일 없이 자기가 사는 동네 일은 전혀 알지도 못한 채 한 달 동안이나 지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생활을 훼손당하지 않고 제대로 보전하려면 데카르트처럼 하루에 두 어 번씩 경비원이나 호텔의 계원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을 감내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민음사 85p)
내가 특히 좋아하는 부분은 데카르트를 언급하는 이 대목이다. 데카르트의 삶은 분명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세상에 완전히 잠식되지 않는 한 인간의 태도를 보여준다. 이것은 단순한 은둔을 찬미하는 말이 아니다. 장 그르니에가 말하고자 하는 건 바로 그 균형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면서도, 자기 정신 한 구석에 자신만의 은밀한 방을 닫아 두지 않는 삶이다. 어쩌면 내가 바라는 삶일 수도 있고,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조용한 답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이 대목은 장 그르니에가 저에게 주는 하나의 조언처럼 들린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나는 또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를 떠올린다. 피카르트 역시 침묵을 단순한 결핍으로 보지 않는다. 피카르트가 말하는 침묵은 말이 사라진 자리의 공백이 아니라, 사유를 더 깊게 만들어주는 조건이다. 그렇게 보면, 장 그르니에가 데카르트를 통해 말하는 정신적 고요는 피카르트가 말하는 침묵의 세계와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다. 넘치는 말에 사유가 묻히는 이 시대에 둘 다 결국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섬>에서 <침묵의 세계>로 이어지는 독서는 단순한 연관이 아니다. 한 권의 책이 다른 한 권의 책을 불러와 사유를 더 깊게, 더 연장시키는 일이다.
내가 이 책 <섬>을 세 권이나 갖고 있는 이유도 아마 그와 비슷하다. 한 권으로는 부족해서가 아니라 다른 시간 속에서 다시 꺼내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책과 독서는 나 자신을 지적인 게으름에서 일어나도록 닦달하는 일종의 충동이다. 그리고 이 충동이야말로 현재 나를 있게 하는 가장 강력한 동기다.
장 그르니에의 <섬>을 세 권이나 가지고 있음에도, 그렇게 수없이 읽었음에도 애써 다시 읽는 일은 결국 내 안의 섬을 다시 발견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섬에서, 나는 비로소 말이 넘치다 못해 해악이 되는 세상으로부터 잠시만이라도 도피하는 법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