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귀환 ― 자크 루시에의 비발디
봄이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음악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비발디의 ‘사계‘중 ‘봄’은 압도적이다. 사실 비발디의 사계는 봄뿐만 아니라 계절에 상관없이 듣게 되는 곡이기도 하다.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익숙한 탓에 때때로 진부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사계’는 단지 친숙한 클래식 명곡으로만 얘기할 수 있는 음악이 아니다. 본래는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비발디는 네 개의 계절을 각각 세 개의 악장으로 나누어 자연의 변화를 세밀히 그려냈다. 악보 곳곳에는 계절의 풍경을 묘사하는 시(소네트)가 덧붙어 있어서 소리와 언어가 한 몸처럼 호흡한다. 그 덕분에 ‘사계’는 표제음악의 원형이라 불린다.
이 작품의 대표적인 연주는 수없이 많다. 이탈리아 챔버 앙상블 ‘이 무지치’ 버전은 정통의 대명사로 불리고, 파비오 비온디와 유로파 갈란테의 해석은 생동하는 바로크의 매력을 되살린다. 또 막스 리히터는 이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하며 원곡의 틀을 완전히 새롭게 해석했다. 그러나 제가 매해 봄이면 꺼내 듣는 ‘사계’는 바로 자크 루시에 트리오(Jacques Loussier Trio)의〈Vivaldi: The Four Seasons>이다.
피아니스트 자크 루시에는 1959년 '플레이 바흐 트리오'를 결성한 이래 줄기차게 바흐를 재즈로 연주한 바흐 스페셜리스트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바흐에서 멈추지 않았다. 헨델과 비발디, 베토벤과 쇼팽, 드뷔시와 라벨, 심지어 사티까지 닿는다.
자크 루시에는 클래식을 재즈의 언어로 연주한다고 해서 결코 원곡이 지닌 구조를 해체하거나 질서를 흐트러뜨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 리듬과 즉흥이라는 재즈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그런 이유로 클래식을 재즈로 연주한 아티스트를 얘기할 때 자크 루시에와 그의 트리오를 빼놓고는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클래식과 재즈는 언뜻 대척점에 놓인 장르처럼 보인다. 한쪽은 악보의 엄격한 질서를 따르고, 다른 한쪽은 자유의 즉흥을 본성으로 삼는다. 그러나 재즈에는 초창기부터 클래식의 유산이 깊게 배어 있다. 구조와 화성, 그리고 기법 면에서 재즈는 클래식에 상당한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그렇기에 클래식을 재즈로 연주하는 것이 전혀 부자연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단지 적당한 균형감각이 필요할 뿐이다.
이 앨범〈Vivaldi: The Four Seasons>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그 균형의 완성도에 있다. 일반적으로 클래식을 재즈로 연주할 때 특히 중요한 요소는 원곡의 분위기와 구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재즈 고유의 스윙을 어떻게 구현하는지에 있다.
이런 관점에서, 자크 루시에 트리오의 ‘사계’는 원곡의 정취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재즈 특유의 스윙감과 즉흥성을 완전히 살려냈다고 평가받는다. 베이스의 뱅샹 샤르보니에와 드럼의 앙드레 아르피노는 피아노의 흐름에 절묘한 리듬의 결을 맞추며 무게감을 더한다.
음반을 데크에 올려놓고 플레이 버튼을 누르면 피아노 소리보다는 먼저 베이스와 드러밍이 먼저 귀에 들어온다. 곧이어 터지듯 쏟아지는 자크 루시에의 경쾌한 건반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게 만든다.
이 음악이 그토록 식상하게 들어왔던 비발디의 사계라니! 오 세상에나!!!
비발디의 ‘봄’이 현악기의 가벼운 터치로 산들바람을 묘사했다면, 자크 루시에의 ‘봄’은 그 바람 속에서 터져 나오는 생명의 경쾌한 리듬을 포착한다. 잎들이 흔들리고, 햇살이 쏟아지고, 땅속에서 무언가 움트는 듯한 감각이 밀려온다. 전체 곡의 흐름 중에서도 특히 이 봄 부분이 가장 인상 깊은 건, 오로지 자크 루시에의 창조적인 편곡과 연주 능력 때문이다. 비발디의 사계가 가지고 있는 익숙함을 단번에 날려버릴 만큼 신선하다.
봄의 1번 트랙 알레그로가 유려한 피아노 리프와 드럼 브러시가 교차하며 생명력의 파장을 그려냈다면, 6번 트랙 프레스토에서는 여름의 폭풍우가 몰아치는 듯한 긴장감이 재즈적 리듬으로 재현된다. 8번 트랙 가을의 아다지오 몰토는 낙엽이 지는 늦은 오후를 닮았고, 11번 트랙인 겨울의 라르고에서는 눈 덮인 도시의 고요함이 흰 숨결처럼 번진다.
여기에 각 계절에 붙어있는 소네트와 함께 즐긴다면 여태까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들어온 사계에 대한 진부한 선입견을 완전히 바꾸게 된다.
이 앨범을 듣고 있으면 비발디가 그렸던 자연은 더 이상 유럽의 풍경이 아니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의 찬란한 봄의 모습이다. 클래식의 질서와 재즈의 자유가 한 지점에서 맞닿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사계’가 지금 여기에서 다시 태어나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봄이다. 계절은 언제나 되돌아오지만 같은 봄은 두 번 다시없다. 자크 루시에 트리오의 ‘사계’를 듣고 있으면 매년 피어나는 봄이 아니라 매번 새로 태어나는 봄을 만나게 된다. 어쩌면 그 봄은 자연의 소리가 아니라 내 안에서 다시 깨어나는 하나의 리듬인지도 모른다.
https://youtu.be/5SYo4IJX664?si=hScpbbxqlF0e-gr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