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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디언스 Dec 28. 2021

망가진 책에 담긴 기억을 되살리는

리디언스의 서재 - 어느 책수선가의 기록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 (재영 책수선, 위즈덤하우스)


책을 좋아하는다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있다. 하나는 책을 읽는 행위, 즉 독서를 좋아한다는 의미일 테고, 또 하나는 물성으로서의 책 자체를 좋아한다는 뜻이다. 나는 이 두 가지 이유 모두로 책을 좋아한다고 말해야겠다. 물론 책 읽는 속도보다 늘 구입하는 속도가 빠르니 후자의 의미가 조금은 더 크다고 말할 수도 있다. 아무튼 새 책이 나온다는 기대감, 책을 산 다음 첫 장을 펼치는 순간의 그 쾌감, 책을 읽는 행위 자체에서 오는 안락함, 다 읽은 책을 책장에 꽂고 바라보는 뿌듯함까지 그 일련의 과정 모두를 즐긴다. 그런저런 이유로 낡고 헤어진 오래된 책 조차도 쉽게 처분하지 못하고 쌓아두는 편이다.





그래서일까?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물건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나는 어쩌면 책 한 권을 집어 들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초교 5학년 때 앞으로는 이런 것도 읽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아버지께서 사주신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이다. 우리가 아는 그 헤밍웨이의 책이 맞다만 ‘노인과 바다'가 아니라 ‘바다와 노인’이다. 제목이 조금 우스꽝스럽게 뒤틀렸지만 여타 노인과 바다와는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한 책이다. 단순히 물리적인 시간이 담겨 있는 물성으로서 뿐만 아니라 지금은 세상 밖에 계신 아버지와 함께 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 책 어딘가에 아버지의 손때와 지문도 틀림없이 남아있으리라 생각을 하면 가슴 한편이 뜨거워지면서 아직 내 곁에 남아있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느껴진다.







책을 만질 때는 조금은 강박적이라 할 만큼 조심스럽게 다룬다. 책에 밑줄을 긋거나 낙서를 한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다. 페이지 모퉁이를 접는 것조차 저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끼는 책은 박물관의 유물 다루듯 장갑을 끼고 만지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내 책장에 있는 책들은 거의 새 책이라 할 만큼 깨끗한 상태로 꽂혀 있다. 하지만 책에 부여된 물성의 견고함도 흐르는 시간 앞에서는 별 의미가 없는 듯하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만지며 애지중지 했는데도 아버지가 주신 ‘바다와 노인’은 만약 내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버려졌을 만큼 여기저기 헤어지고 바스러질 듯 낡아버렸다.


몇 년 전 이 책의 보존 방법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할 무렵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책수선’이라는 단어였다. 정확히는 ‘재영 책수선’이다. SNS를 통해 책수선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왠지 내 이야기를 듣는 듯했다. 아. 세상에는 오래된 책을 어쩌지 못하고 어떻게든 간직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나 말고도 이렇게 많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또 책을 수선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이 분은 대체 어떤 분일까 라는 궁금증도 생겼다. 그러면서 훗날 언젠가 오래되어 낡아버린 책과 그 책의 수선을 맡긴 주인의 사연들, 그리고 책을 수선하는 이의 이야기들을 모아 또 한 권의 책을 만든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은 연남동의 작업실에서 의뢰받은 낡고 망가진 책을 수선하는 ‘재영 책수선’의 대표가 쓴 책이다. 내가 생각한 바로 그 책이다. 재영 책수선에 책을 맡긴 책 주인들과 책에 얽힌 특별한 이야기들이다. 책은 세상 어딘가에 똑같이 존재하고 낡아지고 훼손되는 과정은 모두 비슷하다. 그러나 저자에게 맡겨진 책은 존재론적으로도 유일하지만 담겨 있는 시간, 사연 모두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것들이다. 그렇기에 저자 ‘재영 책수선’의 작업은 그 책에 담겨 있는 시간과 추억을 되살려 놓는 것과 동시에 또 다른 시간과 추억을 덧입히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 작업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오래된 책에서 나는 책 냄새를 맡는 듯하다.


아무튼 나의 ‘바다와 노인’은 낡고 바래고 페이지가 낱장이 되어 곧 바스러질 위기에 있다. 책을 어쩌지 못한 것은 오래된 물건이 시간의 흐름에 스러지는 것에 마음을 뺏기는 내 성향 탓도 있지만 사실 게으름 때문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나도 ‘재영 책수선’에 이 책 '바다와 노인'의 수선을 맡기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아버지께서 사주실 때의 추억과 지금까지 이 책을 매만졌던 나의 이야기에 새로운 시간을 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 (재영 책수선, 위즈덤하우스)은 오래되고 낡은 책에 담긴 유일한 시간들과 이야기를 소중한 가치로서 세상에 내놓은 정말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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