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트라르카 서간문 선집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김효신 역, 작가와비평)
W. G. 제발트는 그의 작품 <현기증. 감정들>에서 스탕달의 연인 마담 게라르디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새로 발명된 깃펜깎이를 오늘 오전에 샀어요. 펜을 깎을 때 번거롭지 않아서 정말 기쁘더군요. 하지만 그 물건의 존재를 몰랐을 때도 나는 불행하지 않았어요. 페트라르카가 고작 커피를 못 마셔봤다는 것 때문에 불행했겠어요?” (현기증. 감정들, 27p)
여러 해석이 가능한 문장이지만, 가장 합리적인 독해는 이 문장이 결핍의 문제가 아니라 ‘충만의 방식’에 대한 물음이라는 데 있다. 커피를 몰랐던 시대의 인간이 과연 불행했을까? 그렇지 않다는 말은 충만은 사물의 소유가 아니라 정신의 교류에서 비롯되었다는 뜻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 ‘페트라르카’는 14세기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인문학자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를 가리킨다. 그는 르네상스의 문을 연 최초의 인문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유럽 각지를 떠돌며 수도원 서고를 뒤지던 그는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잃어버린 서한집을 찾아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고문헌의 발굴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다시 잇는 다리가 되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죽은 자의 문장이 산 자의 사유를 흔드는 그 순간에 인문주의가 태어난 것이다. 키케로와의 만남은 결과적으로 인간의 내면을 깨우는 여정이 되었고, 이를 통해 새로운 철학적 감각을 일깨운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오늘날엔 그가 왜 대단한 문학가이자 휴머니스트인지, 왜 인문주의의 상징으로 불리는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럼에도 그가 단테 이후 최고의 이탈리아 문학가이자 사상가로 평가받는 이유는 페트라르카가 단순히 텍스트를 연구한 학자라기보다는 ‘철학을 하는 새로운 방식’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즉 그가 보여준 과거에 대한 탐구는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문화적 전환의 토대가 된 것이다. 그의 사유를 학문적 체계로 정립하며 만든 교육 커리큘럼의 결실이 바로 ‘인문학(studia humanitatis)’이다. 그리스어와 라틴어, 그리고 그 언어들로 된 고대 문헌의 습득을 중시하며 수사학과 도덕적 사고를 강조한 학문, 즉 인간의 정신을 수양하는 학문이 되었다.
흔히 ‘인문학을 공부한다’고 하면 고전을 읽거나 철학서를 탐독하는 일을 떠올린다. 바로 이것이 페트라르카가 창시한 인문학의 방법론이다. 이 방법론 덕에 르네상스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역사가와 인문학자들은 말한다.
언젠가 소개했던 스티븐 그린블랫의 <1417년, 근대의 탄생>에는 페트라르카의 독서태도를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다.
“금, 은, 보석, 자줏빛 의상, 대리석으로 지은 집, 잘 손질된 부지들, 경건한 회화, 성장한 말들. 이런 것들은 변덕스러우며 피상적인 쾌락을 줄 뿐이다. 반면에 책은 우리의 뼛속 깊숙이 골수에까지 기쁨을 준다. 책은 우리에게 말하고, 우리와 더불어 생각을 나누며, 생생하고 강렬한 친밀감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1417년, 근대의 탄생, 150p)
이 언급은 페트라르카의 책과 고전을 사랑한 방식이 얼마나 근원적인지를 말해준다. 그에게 책은 단순한 지식의 보고가 아니라 존재에게 위안을 주는 생명 그 자체였다. 그렇기에 제발트의 작품 속 마담 게라르디가 말했듯, 그는 고작 커피를 맛보지 못했다고 해서 절대 불행할 리가 없었다. 그의 행복은 물질의 결핍이 아닌 정신의 충만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페트라르카는 수많은 편지를 남겼다. 흥미롭게도 그 편지들 중 많은 부분이 이미 세상을 떠난 고대 작가들에게 보내는 형식으로 쓴 것이다. <페트라르카 서간문 선집>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김효신 역, 작가와비평)은 그런 그의 편지를 모은 책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인문학’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학문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태도이자 삶의 방식이자 무엇을 읽느냐보다 어떻게 읽느냐가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된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인문주의 태동 초기 풍경을 온전히 느끼려면 키케로의 여러 산문들, 특히 <의무론>과 함께 이 책 <페트라르카 서간문 선집>을 반드시, 우선적으로 읽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키케로가 공적 덕성과 시민의 의무를 말한다면, 페트라르카는 그 덕성을 개인의 내면 속에서 깨닫는 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인문주의는 이 두 가지의 보편적 인식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요 며칠 전철에서 오며 가며 읽었는데 생각한 것보다 훨씬 재밌다.